매일신문

[소리와 울림] 속죄양' 정치

연세대(독문과)·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철학박사) 졸업. 전 계명대 총장
연세대(독문과)·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철학박사) 졸업. 전 계명대 총장

힘센 정치인은 힘 없는 정치인 탓하고

국민은 대통령에게 과다한 책임 묻고

대통령은 법안 처리 안한다며 국회 탓해

모든 위기의 책임 결국 정치가 짊어져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속죄양' 전략은 매우 오래된 제도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속죄양 용어는 인간의 원죄를 염소에게 전가하고, 인간의 죄를 짊어진 염소를 황야로 내쫓아 버리는 성경 속의 유태인 관습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속죄양은 나에게 닥친 뜻밖의 불행이나 내가 잘못하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부당하게 책임을 지우는 위기 극복 전략이다.

그렇다면 속죄양은 종교에서처럼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일까? 속죄양은 정치적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위기 극복의 장치 같은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하여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속죄양을 만들어낸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속죄양이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짊어지게 된 '원죄'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직면하고 있는 위기 자체가 중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속죄양을 만들고 싶은 깊은 유혹에 빠진다.

우리는 지속적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영원히 반복되는 북한의 핵 위협, 글로벌 경제위기를 초래할 것 같은 중국 경제의 악화, 국제 유가의 하락과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1천2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와 점점 더 심화되는 사회의 양극화, 고령사회에 따른 노인빈곤과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청년실업률은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 청년실업률이 9.2%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새해 벽두부터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모두가 느끼고 인정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위기다.

위기가 깊어지면 속죄양을 불러 세울 시기다. 위기는 극복해야 하는데 극복할 역량과 대안도 없으면 속죄양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상징적인 동물 염소가 아닌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국민을 위해 책임을 다하겠다는 정치와 정치인은 쉽게 속죄양의 희생물이 된다. 정치인은 국민이 맡긴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4년마다 정치적 책임의 속죄양이 되어 정치 무대를 떠난다.

그렇다면 누가 책임을 묻는가? 누가 속죄양을 만드는가? 정치인을 단죄하는 것이 국민이라고 믿고 싶다면, 그것은 정말 순진한 생각이다. 정치인을 속죄양으로 만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다른 정치인이다. 힘센 정치인이 힘없는 정치인을 속죄양으로 만든다. 소수 집단이 권력을 가진 다수 집단에 의해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대해 실제의 원인과 상관없이 비난을 받고 책임을 지게 된다. 이처럼 편리하게 위기를 회피하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온갖 문제들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한 해결책을 추구한다. 모든 책임을 정치로 돌리는 것도 그중 하나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실업자가 발생해도 정치의 책임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는 것도 정치의 책임이다. 천재지변과 같은 돌발적 사태가 발생해도 정치의 책임이다. 국민들은 이렇게 모든 것을 정치 탓으로 돌린다. 그것도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게 과다한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대통령의 말을 듣다 보면 모든 책임을 국회의 정치로 떠넘기려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이 비상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개혁 법안 등 여러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만 통과되면 69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파견법만 통과되어도 당장 1만3천여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한다. 이런 법안들이 제때 처리되지 않아 대응이 더 늦어지면 "우리 경제는 성장 모멘텀을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설령 이 정부가 요구하는 법안이 모두 통과되어도 경제가 좋아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모든 위기의 책임을 짊어질 속죄양이 정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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