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김병조 조선대 초빙교수(전 '일요일 밤의 대행진' 진행자)

"개그맨서 한학자로…방송 떠나게 한 민정당 사건도 나의 스승"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김병조 교수와 대담을 한다고 하자 아내가 말했다. "김병조? 예전의 그 '배추머리' 김병조? '지구를 떠나거라' 하던…?"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바로 "왜?" 하고 묻는다. 그래서 대답했다. 개그맨이 아니라 명심보감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한학자로 만나는 것이라고. 그러자 아내가 하는 말, "그렇구나. 그래, 예전부터 뭔가 좀 달랐어".

1980년대 와 으로 안방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는 지금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초빙교수로 있다. 명심보감 연구의 권위자이자 명강사이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명심보감과 다른 명심보감 청주판의 완역본인 저자이기도 하다.

어떤 사연으로, 또 어떤 배경으로 그의 인생이 이렇게 달라졌을까? 지금이 더 없이 행복하다는 그를 매일신문 서울지사에서 만났다. 속의 그림을 그린 그의 아내 김현숙 동양화가도 함께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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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김병조 교수가 붓펜으로 쓴 한문 글을 보며) 글씨가 보통이 아니다. 언제부터 쓰셨나?

김병조: 과찬이다. 어릴 때부터 고전이나 우리 것에 관심이 많았다. 글도 한자로 쓰는 걸 좋아했다. 잘난 척하느라고….(다 같이 웃음)

김병준: 어릴 때부터라면 집안이 유학자 집안?

김병조: 광산(光山) 김가로 몰락한 선비 집안이었다. 생활도 어려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한학을 했고, 또 서당 훈장을 한 덕에 늘 양반문화나 선비문화 분위기가 흘렀다.

김병준: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김병조: 오히려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 손에 자라다시피 했는데 말을 배우면서부터 "어디 김가인고?"라고 묻곤 하셨다. "광산 김가"라고 답하면 "오냐, 양반이구나" 하면서 곶감 하나를 주곤 하셨다. 아버지는 매우 엄하셨다. 동생들에게는 그러지 않으셨는데 유독 7대 장손인 나에게만 그러셨다.

김병준: 그러다 어떻게 연예계로 가셨나?

김병조: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등록금 걱정 없는 육군사관학교를 가려 했다. 그런데 광주고등학교 진학 후 이게 달라졌다.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다들 예능계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거다.

김병준: 소질이 다분했던가 보다.

김병조: 주변에서 그러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고민하며 연극영화과 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후 4년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장학금 지키느라고.(웃음) 군대 갔다 오면 장학금을 놓칠까 봐 군대도 졸업하고 갔다.

김병준: 그러면 연예계 입문은 언제?

김병조: 군 연예대에서 복무하고 제대를 하는데, 부대 간부가 고생했다며 자매결연을 하고 있던 TBC 동양방송에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테스트를 받고 전유성 등 개그맨 1세대들이 출연하고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개그 프로그램 '살짜기 옵서예'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게 데뷔였다.

김병준: 그 뒤 1980년 MBC로 옮기게 되고, 등으로 승승장구하셨다. "지구를 떠나거라" 등의 유행어가 지금도 생생하다. 개그 프로였지만 격조도 있었다.

김병조: 나름 우리의 웃음을 찾으려 했다. 후배들에게도 미국 코미디보다는 하회탈춤 같은 것에서 우리 웃음을 찾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명심보감 구절도 많이 가져 왔다. 예를 들면 혼인을 함에 있어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 법도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부분을 응용해 당시의 잘못된 혼수문화를 꼬집는 것 등이었다.

김병준: 한두 해도 아니고 내리 7년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 민정당 전당대회 건이 터진 것 같다.

김병조: '일성지화'(一星之火)도 '능소만경지신'(能燒萬頃之薪)이라, 한 점의 불티도 능히 큰 숲을 태운다고 '그 일'로 모든 게 무너졌다. 빗발치는 항의전화와 엄청난 비판과 질책들…정말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이란 1987년 6월 10일 당시 여당인 민정당 전당대회 사회를 보면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 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던 일이다. 받은 원고를 그대로 읽은 것이었지만 비난의 화살은 모두 발언의 당사자인 사회자 김병조를 향했다.

김병준: 민정당에 대한 반대가 거셀 때라 더 했던 것 같다.

김병조: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술 담배도 안 하고, 엄하게 자란 탓인지 야간 업소 출연도 하지 않았다. 대본을 받으면 그 위에 항상 '성실' '겸손'이라고 썼다. 그리고 누나 이름을 썼다.

김병준: 누나?

김병조: 나 때문에 고생한 누나였다. 열심히 바르게 살자는 뜻에서 그 이름을 대본 위에 썼다. 하지만 한순간에 다 무너져 버렸다.

김병준: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정치에는 조크나 해학, 풍자가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큰 문제로 삼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김병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 내 잘못이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부도덕한 사람들을 보고 "지구를 떠나거라" "나가 놀아라" 하지 않았나. 아껴주었던 팬들과 국민들에게 미안했고 조상 뵐 낯도 없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김병준: 그래서 방송을 그만두었나?

김병조: 도덕적으로 MBC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마침 SBS가 개국해 그리로 옮겼다. 하지만 예전처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고향 광주에 광주민방 KBC가 생겼고, 여기서 노래자랑 프로를 맡아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왔다.

김병준: 지방으로 내려가는 기분이 착잡했겠다.

김병조: 아니다. 보다 더 열심히 했다.

김병준: 그러면 강의는 언제 시작했나?

김병조: 노래자랑 프로를 진행하던 중 조선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연기와 개그를 한 학기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수강생 모집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반인 상대 강의라면 교재도 있고 해야 하는데 개그나 연기에 그런 게 있나. 그래서 명심보감 강의를 역제안했는데, 이게 받아들여졌다.

김병준: 학생들이 좋아했을 것 같다.

김병조: 집안 전통이라 그런지 가르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고전과 과거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금언들을 해학과 풍자를 섞어 풀이했다. 반응이 좋았다.

김병준: 그래서 그게 정식 학부 강의와 대학원 강의로 이어지고?

김병조: 한번은 당시 총장이었던 양영일 박사가 평생교육원 강의에 수고가 많다며 식사 초대를 했다. 그리고 식사 중, 집의 아버지도 한학자이신데 지금 문집 하나를 번역하고 있다고 했다. 문집 이름을 물었더니 '송천집'이라 했다. 그래서 바로 응(應)자 정(鼎)자 선생의 직계 손인가 물었더니 깜짝 놀라셨다. '개그맨이 어떻게?' 하는 것 아니었을까?(웃음)

김병준: 놀랄 만도 하지.

김병조: 아마 강의 부탁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이 일로 더욱 자격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바로 "이제 우리 조선대학 못 떠난다. 학생들보고 다른 데 못 가게 막으라고 할 거다"고 하셨다.

김병준: 강의 제목이 무엇이었나?

김병조: 이었다. 첫 학기에는 100명 정도 들었다. 그러던 것이 그다음 학기부터는 600명이 되었다. 큰 강의실이 없어 여러 번 나누어서 했다. 이후 다시 교육대학원 강의도 하게 되고…. 지금은 교육대학원 소속 초빙교수로 있다.

김병준: 인생이 바뀌어 버린 셈이다.

김병조: 그렇다. 연예인에서 연예인과 교수를 겸직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이제는 아예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인생 무대에서 배역이 달라진 것이다.

김병준: 그런데 쓰신 책 를 보면 시중의 명심보감과 좀 다르다. 내용이 더 있는 것 같다.

김병조: 청주판이라 그렇다.

김병준: 청주판이라면?

김병조: 명심보감은 세종 때 명나라에서 들어와 초판이 만들어졌다. 청주 목판관 구인문이 주도하고 충청도 감사 민건, 청주목사 황보공 등 5인이 참여했는데, 일종의 도덕재무장을 위해 간행된 것 같다.

김병준: 도덕재무장? 그만큼 세상이 어지러웠나 보다.

김병조: 구인문 등 참여자들이 모두 단종 세력이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충신이 역적이 되고 하던 때이다. 그런 세상이 단종 쪽에 서 있다가 청주 등 충청도로 좌천된 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겠나.

김병준: 일종의 운동권 서적이네.(함께 웃음) 그런데 왜 이게 주류가 되지 않고 지금의 명심보감이 주류가 되었나?

김병조: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와서 경북의 어느 고가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존재 사실 자체를 몰랐다. 그 사이 시중에서 흔히 보는, 중요한 내용들을 뺀 명심보감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김병준: 내용상 차이가 많이 나는가?

김병조: 그렇다. 예컨대 청주판에는 맹자가 29편이나 있는데, 시중의 것에는 이게 없다. 공자는 인(仁), 맹자는 의(義) 아니냐. 맹자는 옳고 그름을 중시하는데 이게 빠져 있다. 그 외에도 좋은 내용이 많이 빠져 있다. 우연히 빠진 것이 아니라 빼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사회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김병준: 새로운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름을 얻는 데 있어서나 돈을 모으는 데 있어 연예인이 훨씬 더 나을 텐데?

김병조: 지금이 행복하다. 명심보감에 "부귀영화가 좋은 줄 모르는 바 아니나 빈촌의 길이라도 아름다운 길이면 그 길을 간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마음이다.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 그러면서 남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김병준: 1987년 민정당 사건에 대한 원망도 없는 모양이다.

김병조: 당연히 없다. '도오악자 시오사'(道吾惡者 是吾師)라.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라 했다. 그때 그 기사를 쓴 기자부터 나의 스승이다. 나로 하여금 지금과 같은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해 주었다.

김병준: 개그맨 출신으로 강의를 하는 게 어떤가? 좋은 점, 나쁜 점 다 있을 것 같다.

김병조: 나쁜 점은 개그맨 출신에 대한 시각이다. "개그맨이 무슨 한학을 해" 하는 거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한다. 좋은 점은 많다. 우선 내가 누군지를 소개할 이유가 없다. 또 적절한 해학을 섞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김병준: 강의의 핵심은 전달이다. 그 점에 있어 절대적 강점을 가지고 있으시다.

김병준: 하지만 점점 김병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교수만 한 사람인 줄 아는 친구도 많다. 사인을 해 달라는 친구들이 있기는 한데, 모두 엄마가 받아 오라고 한단다.(모두 웃음)

김병조: 그 젊은이들이 요즘 참으로 어렵다. 그들을 위해 한마디 해 주었으면 한다.

김병조: 나도 형편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다. 흙수저 금수저 하는데, 금도 흙 속에 있다. 실망도 분노도 하지 말고 열심히 바르게 살면 기회가 온다.

김병준: 명심보감에 공직자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을 위한 말도 많은데, 한마디 해 주었으면 한다.

김병조: '기신정'(其身正)이면 '불령이행'(不令而行)이지만 '기신부정'(其身不正)이면 '수령부종'(雖令不從)이라, 지도자의 처신이 바르면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이행하지만, 지도자의 처신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린다 해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김병준: 바르게 행동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김병조: 다른 무엇보다 참는 게 으뜸이다.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지도자가 참으면 나라가 편하다. 형제도 서로 참아야 화목해지고, 부부도 서로 참아야 백년해로한다. 또 친구도 서로 참아야 우정이 지속된다. 개그식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 바를 정(正) 자를 봐라. 한 일(一) 자 밑에 멈출 지(止) 자이다. 멈춘다는 것은 무엇이냐? 참는다는 것이다. 바르다는 것은 뭐냐? 한결같이 참는다는 것이다.

김병준: 문자 쓰고 옛 이야기 많이 하셔도 고리타분하다는 이야기는 안 들으실 것 같다.

김병조: 고전이 현대적 의미를 상실하면 고전한다.(웃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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