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경북고 동창은 의리가 없다?

'국가인재 DB 수록 전국 3위, 현존 법조인 전국 3위, 1급 이상 공무원 전국 2위….' 대구의 한 고교 홈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음 문구를 보면 더 놀라게 된다. '국회의원 연인원 173명, 대통령 1명, 국회의장 3명, 대법원장 1명, 국무총리 1명 배출….'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 경북중'고 출신의 성공기이다.

경북고 동창의 특징에 대해서는 조갑제 기자가 쓴 '경북고 출신의 한국경영'이라는 글이 유명하다. "경북여고 출신 부인이 많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다. 예컨대 노태우 대통령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합된 힘으로 밀어준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많다. 끈기가 있다. 경북고 인맥이 불평등하게 중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경북고 출신이기 때문에 요직에 앉았다'는 말을 듣기는 어렵다."

경북고 출신의 끈끈한 단결력은 학연'혈연으로 얽혀 있는데다 동창회 조직이 기별'직업별로 다원화돼 자주 만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글은 20여 년 전 노태우 정권 때 쓰여졌기에 현재와는 다를 수 있지만, 고교 비평준화(1958년생 이전) 시절의 경북고 출신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닐까 싶다.

주위에 경북고 출신이 꽤 있는데, 이분들은 유독 자주 모이고 친밀하게 붙어다닌다. 경북고 동창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의리와 단합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혹자는 단결력으로는 '호남향우회, 고대동문회, 해병대전우회'를 꼽고 있는데, 경북고 동창회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치판에 가면 경북고 출신들의 의리와 단합이 어디론가 실종되고 만다. 의리와 단합은 외지인 서울에서나 통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시장'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동창끼리 혈투를 벌이는 일이 너무 잦다. 잘난 분이 많은데 자리가 한정돼 있어 그런지, 권력'감투 앞에는 동창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 심약한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가 기억하는 경북고 출신 간 최대 격전은 1990년 대구 서갑 보궐선거였다. 5공, 6공 싸움으로 대표되는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문희갑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다 민주당 후보로 동문인 백승홍 전 의원이 맞붙었다. 파란 속에 정 전 장관이 중도 사퇴하고 문 전 수석이 이겼다. 1995년 초대 민선 대구시장 선거에는 무려 4명의 경북고 출신이 나와 난타전 끝에 문희갑-이의익-이해봉-조해녕 순으로 득표했다.

이제 시간이 흘러 비평준화 세대가 퇴장하는 것 같더니만, 이번 총선에 다시 경북고 동창 간의 진흙탕 싸움이 예고돼 있다. 중'남구의 배영식(49회)-김희국(58회), 동갑의 류성걸(57회)-정종섭(57회), 북을의 서상기(경북중 45회)-김두우(56회)-주성영(57회), 수성갑의 김문수(51회)-김부겸(56회)이 바로 그들이다.

동문이 있는 지역구라면 되도록 피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몇몇은 자신의 욕심만 앞세워 동문 간 싸움을 자청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김부겸 전 의원이 4년 넘게 텃밭을 갈고닦은 곳에 5년 선배인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뒤늦게 뛰어든 것이 대표적이다. 40년간의 인간관계를 무시하고 대권만을 의식한 행보가 아니겠는가.

동갑의 류성걸 의원과 정종섭 전 행자부장관은 한 반에서 공부한 40년 친구 사이다. 동기들이 정 전 장관의 대구행을 반대해 연판장 비슷한 것을 돌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끝까지 싸울 모양이다.

이를 두고 경북고 출신들은 '인재가 넘치다 보니 불가피하게 일어난 상황'이라고 했고, 다른 출신들은 '경북고 패권주의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했다. 솔직히 고교 동창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대구사회에서 동창 간의 싸움은 보기에 영 껄끄럽다. 경북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탐욕 때문에 동창 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몇몇 정치인의 행태가 꼴 보기 싫어 쓴 글이니 오해는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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