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대선(1987년 12월 16일)이 막 끝난 이듬해 2월쯤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입대를 위해 휴학 후 대구서 멀지 않은 고향 시골집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가끔 들러 부모님과 농사일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우리 동네에서 김대중 후보(평화민주당) 표가 3표 나왔다는데, 우리 집을 의심하는 것 같아요. 답답해 미치겠어요."
아저씨는 수년 전에 외지에서 이사 온, 동네에서 전라도가 고향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 투표권자는 아저씨와 그의 아내 2명뿐이었다. "우리 집 둘 다 김대중 후보를 찍었다고 쳐요. 그럼 2표가 나와야지 3표가 나왔는데도 왜 우릴 의심하는지…." 귓속말로 내뱉는 아저씨의 목소리에는 마치 큰 죄라도 뒤집어쓴 듯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필자는 그분이 결코 김 후보에 투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라도 출신이란 이유로 그를 의심했다. 아저씨는 한동안 왕따 신세가 됐다.
그랬다. 그 시절, 영남지역에서 김대중 후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시 유력 대선주자인 노태우(민주정의당) 후보 측 운동원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이로써 영남 민심은 단숨에 평정됐고, 노 후보는 민주화의 상징인 두 거물, 김영삼(통일민주당), 김대중의 분열을 틈타 대권을 잡았다. '빨갱이' 소문은 김대중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의 오랜 민주화 투쟁 전력도 영남권에서는 '빨간 좌파'로 치환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10년 후, 김대중은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빨갱이'로 알고 있던 인물이 대통령이 되다니…. 멘붕에 빠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려는 기우였다. 김대중정부 5년 동안 '빨갱이'에 필적할 큰 변고는 없었다. 과오도 많았지만 IMF 체제 조기 극복, 노벨평화상 수상 등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도 누구 못지않았다. 지난해 한국갤럽 조사에서 김대중은 나라를 잘 이끈 세 번째 대통령에 꼽혔다. 그럼 '빨갱이'로 알고 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선거를 치를 때마다 마주한 화두가 있다. 이른바 '빨갱이' '우리가 남이가' '핫바지' '친박연대' 등의 캐치프레이즈가 과연 누구를 위했던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 진실을 호도하거나, 지역 갈등을 부추기거나, 편 가르는 무기로, 당선을 도모하려던 것 이상으로 봐주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되짚어 보면 이런 구호들은 적대적이고, 네거티브하며, 생산적이기보다는 소모적이었다. 선거 당사자에겐 필승 카드였지만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그랬다는 거다.
4'13 총선이 69일 남았다. 새누리당 예비후보들의 경우 본선(총선)보다 더 치열한 예선(경선)이다. 이번 무기는 '진박'(眞朴)이다. '진박'은 이번 총선에서 태풍의 눈이다. 예비후보들은 저마다 공약과 슬로건을 준비하고 있지만 '진박'으로 평정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억울해하는 후보도 적지 않다.
'진박' 마케팅에 '밀실 임명'이 아닌 '주민 선출'에 방점을 둔 국민공천제는 벌써 김이 빠지는 모양새다. 지역 곳곳에서 편 가르기 조짐도 일고 있다. 그런데, 새누리당 일색인 지역의 눈높이로 보면 '진박'(眞朴)도 '비박'(非朴)도 다 아군들이다. 칼로 물 베기다.
'진박'이라 강요하지 말고, '비박'이라 내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진박'이든 '비박'이든 당원과 주민들이 옥석을 가리면 될 일이다. 굴러온 돌이든, 고인 돌이든 쓸만한 돌을 골라 쓰는 게 중요하다. 이래저래 전국의 시선이 대구로 쏠리고 있다. 대구 유권자는 시험대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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