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 美·中에 의존하는 한국 외교
을미사변 당시 상황과 비슷해 아쉬움
국력 강해진 만큼 수동적 자세 탈피를
한국 주도로 한반도 문제 풀어나가야
지난해 가을, 친구들과 어울려 홍릉수목원(국립산림과학원)을 찾았다. 숲길 중간쯤에 있는 표지판 앞에서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다. '홍릉터의 유래'. 명성황후의 가묘가 있던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표지가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길섶의 한자락 땅. 표지판의 설명에 구한말의 기막힌 역사가 모두 들어 있었다.
"명성황후는…경복궁 곤령각에서 난자 시해당한 후 시신은 궁궐 밖 뒷산으로 운반되어 거적에 말려 석유가 부어져 소각되었다 한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던 명성황후의 시신은 시해 2년 후에야 홍릉으로 옮겨진다. 고종 승하 후 홍유릉에 합장되었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 나라의 국모가 다른 곳도 아닌 궁궐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 작년은 1895년 을미사변 120년이었다. 당시 우리의 처지를 설명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비단 국력이 약했다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유는 잘 알려진 대로다. 조정과 권력자들이 친러, 친일, 친청, 친미파로 갈려 서로 다툼으로써 스스로 나라를 망가뜨린 결과였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긴다.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망가뜨린 후에 남이 망가뜨린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후에 남이 친다."('맹자' 이루 편)
지난해 감상을 풀어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작금의 우리 외교를 보면 비슷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동안 친미, 친중을 놓고 우리 내부의 논란이 있었다.
최근 북한 핵실험에 대한 대응을 놓고도 비슷한 얘기들이 오간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중국경사론을 무릅쓰고 공들인 대중 외교가 쓸모없다는 말도 나온다.
'역대 최상의 한중 관계'라는 일부의 자랑이 자화자찬에 불과했다는 자성도 있다. 안보는 역시 미국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말도 있다. 반면 B-52 폭격기 전개, 사드 배치론 등이 서툴렀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얘기다.
모두 일리가 있다. 외교 안보 전문가들의 말이니 코끼리의 한 부분을 더듬는 건 분명하다. 답답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을미사변 당시와 지금의 우리 위상은 천지개벽만큼의 차이가 있다. 세계 주요 20개국 G20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참석하는 나라다. 힘이 없어 수모를 참아야 할 나라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외교도 다른 나라를 바라만 보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반도의 상황은 우리가 주도하고 다른 나라는 협력하는 구도를 만들어 내야 한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노태우정부 북방정책의 역사가 있다. 흔히 '물태우'라는 말로 비아냥거리지만 노태우정부야말로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찬란한 외교 업적을 쌓은 정권이다.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의 대(對)공산권 수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련, 중국 관련 책이 불온서적으로 취급되던 때였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도 엄청난 사태였다.
1990년 6월 7일 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는 창 밖에서 한국, 미국, 소련이 한편이 되어 놀고 있고, 집 안에서 일본이 혼자 놀고 있는 내용의 만평이 실렸다.
외교적으로 고립됐던 일본은 "중국이나 소련에서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한국에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가 상황을 주도해 온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일화다.
미묘하고 어려운 우리의 지정학적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북한정권의 막무가내 성향을 과소평가하는 말도 아니다. 도발과 제재를 되풀이하며 결과적으로 더 악화되는 상황을 막아야 할 절박함은 결국 우리에게만 있다는 말이다. 북한 핵이 일본의 재무장 책략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 역시 우리에게 가장 첨예한 문제이다.
앞서 인용한 맹자의 교훈을 역으로 보면 우리 스스로 상황을 주도할 때 친중 혹은 친미가 우리에게 효용이 있는 것이다. 경제에만 창조경제가 필요한 게 아니다. 외교에도 상상력과 창의력이 결합된 창조외교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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