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TK, 물로 보지마라"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심 읽어야 '승자'

4·13총선-현역 의원 심판론 어떻게?

대구가 뜨겁다. 과거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던 대구의 총선판이었지만 이번 4'13 총선은 시계 제로(0) 상태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대구 민심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향식 공천을 지향하는 경선제도가 도입되면서 최종 공천 결과는 더 오리무중이다. 박 대통령을 방패 삼은 이른바 '진박 후보'들은 현역의원 심판론을 제기하며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 언론과 방송도 유례없이 대구의 총선판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들은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난 15대 총선부터 19대까지 대구 민심의 흐름과 선거 분위기를 분석해보면 현역 국회의원들의 생존 여부를 파악하는 데 일정 부분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YS 정권, TK 소외시켜 자민련 13석 중 8석 차지

1996년 15대 대구 총선은 반YS 분위기가 팽배했다. YS를 지지했으나 그의 재임 동안 대구경북(TK)은 정치적으로 소외됐다. YS 정권의 TK 소외로 고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민자당을 탈당했다. 9선에 국회의장만 3차례 지낸 그는 'TK'의 상징 인물이었다. YS는 1993년 2월 고위 공직자의 재산 공개를 선언했고, 이때 박 전 의장에게도 불똥이 튀어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박 전 의장은 '격화소양'(신발을 신은 채 발바닥의 가려운 데를 긁음)이라는 말과 함께 YS에게 서운함을 드러내며 민자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합류했다. TK 대표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정치 중심에서 밀려나자 TK 민심은 요동쳤다.

앞서 치러진 1995년 첫 동시 지방선거에서 YS 공천을 받은 여당 후보가 대구시장 선거에서 4등을 했다. 당시 대구 국회의원 13석 중 8석을 자민련이 차지했고 무소속 3명, 여당인 신한국당 소속은 2명 뿐이었다. 15대 총선 결과는 "바꿔도 우리가 바꾼다"는 TK의 정치적 자존심을 나타낸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昌의 현역의원 공천 학살, 허주 탈당했지만 참패…

2000년 총선의 한나라당 공천은 허주(虛舟) 김윤환 전 의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김태환 새누리당 의원(구미을)의 친형인 김 전 의원의 별명은 '킹메이커'였다. 탁월한 정치력으로 노태우'YS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당시 언론엔 빈 배를 뜻하는 그의 아호에 빗대 "허주의 배에 누가 올라타나"는 기사가 등장할 정도였다. 특히 김 전 의원은 1992년 대선 직전 부산경남 출신인 YS를 TK가 정서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자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를 앞세워 TK를 결집시켰고, 문민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희생양이 됐다. 5선 의원에 신한국당 대표까지 맡았던 거물이었으나 하루아침에 공천에서 탈락한 것이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결정이었다. 이 총재는 자신의 '정치적 코치'로 불린 김 전 의원을 비롯해 현역의원 43명을 탈락시켰다. 김 전 의원은 반발하며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총선에서 참패했고,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강재섭(4선), 박근혜(재선) 의원을 비롯한 11명 전원이 한나라당 소속이었고, 초선은 김만제, 현승일, 강신성일 3명이었다.

◆'朴다르크' 지휘로 일사불란, 대구 12명 전원 '다선' 등극

2004년 총선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문제가 핵심 이슈였다. 탄핵 여파로 야당인 한나라당에 사상 최악의 패배가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그해 3월 한나라당 대표가 된 박근혜 대통령은 회초리를 앞세웠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그는 취임 첫날 천막당사를 세웠다. 또 TV 광고에는 회초리를 든 어머니까지 등장시켜 "혼내달라"며 유권자의 용서를 호소했고, 침몰 위기에 있었던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을 뚫고 121석을 획득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 '박다르크'(박근혜+잔 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5년 대구에는 '이강철 바람'이 불었다. 노무현정부의 핵심인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이 선거법 위반으로 금배지를 내려놓은 박창달 전 한나라당 의원(동을) 지역구에 출마장을 던져서다. 이 전 수석은 TK가 참여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지역 예산을 많이 끌어와 대구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유승민 의원이다. 한나라당은 이 전 수석을 이길 카드로 당시 비례대표였던 유 의원을 지목했고, 그는 당시 당대표였던 박 대통령과 사무총장이었던 김무성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선거에서 유승민 52%(이강철 44%)의 득표율을 올리면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심장인 대구에 결국 깃발을 꽂지 못했다. 한나라당 소속 12명 전원이 다선이 됐고, 강재섭 의원은 5선, 박근혜 의원은 3선이 됐다.

◆친이계에 희생양 된 친박, TK 친박연대 2명 '금배지'

18대와 19대 한나라당, 새누리당 공천에선 친박의 희비가 갈렸다. 18대에선 MB(이명박 전 대통령)를 등에 업은 친이계가 공천권을 쥐고 친박계를 공천에서 배제했다.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 전 의원은 불출마 선언을 하며 MB에 힘을 보탰다. 이런 상황을 타고 친박연대와 무소속 친박그룹이 탄생했다. 대구에서 조원진(당시 초선), 박종근(당시 4선) 의원 등이 친박연대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때 TK에서 'MB가 너무하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공천권을 휘두르는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4년 뒤 공천권 칼 쥔 친박, "다 바꾸자" 초선 7명 탄생

반대로 19대 공천은 친박이 주도권을 잡았다. 친이의 몰락이었다. 강재섭계로 분류돼 범친이계였던 이명규(북갑)·배영식 전 의원(대구 중'남구), 경북 구미갑에서 3선을 지낸 김성조 전 의원의 공천이 날아갔다. 또 대구에선 "마카 다 바꾸자"(모두 다 바꾸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18대 국회에서 대구 의원 중 초선은 2명에 불과했지만 19대 때는 당시 공천과 분위기 탓에 초선이 7명으로 늘었다.

◆친박·진박·친유…TK '혼선', 수성갑 김부겸 野 깃발 꽂나

4월 총선을 앞둔 지금 대구에선 '진박' 마케팅이 한창이다. 특히 '국회법 파동'으로 청와대와 각을 세운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친유승민계로 분류되는 초선 의원 지역구에 진박임을 주장하는 예비후보들이 출마장을 던진 상태다.

대구 민심은 대통령과 각을 세운 유승민 의원에 대해 '대통령을 도왔어야 한다'는 의견과 '대통령에게 직언할 사람이 필요하고 차기 리더를 키워야 한다'는 견해가 나뉘고 있다. 유 의원과 궤를 같이 한 초선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도 '대통령에게 힘들 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주장과 '초선 의원들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목소리만 큰 의원이 되라는 말이냐'며 옹호하는 의견이 혼재하고 있다. 이같이 복잡다기한 여론 속에서 과연 대구 시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총선이 임박해지면서 시민들의 고민이 더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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