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비슬산을 '삼국유사 문화환경공원' 으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이 선불장에 합격하고 처음 비슬산에 주석한 곳이 보당암·묘문암·무주암이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편 '포산이성'은 일연이 자신의 자리에서 두 성사의 은거지를 기록했을 것이다. 도성은 북쪽의 굴에서, 관기는 남령의 암자에 있었다고 해서 그렇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 16년과 세종 5년 비슬산 대견사의 장육관음이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대견사·소재사·도성사·속성사·정백사·유가사 모두 비슬산에 있다고 했다. 대견사는 비슬산 남쪽 모퉁이에 신라 헌덕왕 때 세워져 그 위치와 창건 연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동여비고는 이를 비교해 팔도의 사찰을 그리면서 비슬산에는 대견사·소재사·도성사·속성사·정백사·유가사를 그렸다.

여지도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사찰에다가 도성사는 도성암으로, 대견사·소재사·속성사·정백사 모두 폐하였으며, 신증에서 옛 소재사를 이건하기 위해 금천사를 세웠으며, 수도암·동암을 유가사 속암으로 기록했다. 여지도는 폐사를 빼고 유가사·금천사만 그렸으며, 도성암은 누락시켰다. 해동지도는 유가사·도성암·소재사를 그려 넣었는데 원통암이 새로 나타났다.

필자는 과거 비슬산에서 자연휴양림을 만들 때 임도부터 먼저 닦았다. 지금 보면 임도의 최대 수혜자는 낙동강강우레이더와 대견사가 됐다. 당시 두 절터와 석탑 두 기를 발견하였다. 석탑은 도굴꾼의 소행으로 파이고 깨어진 채 흩어져 있었다. 석탑은 복원 요청해 그 이듬해 반듯하게 세운 뒤 현지 주민으로부터 채록해 금수암지 삼층 석탑과 염불암지 삼층 석탑으로 이름 붙였다. 대견사지 석굴에는 청도 오산의 김모 씨가 구들장을 깔고 도배한 뒤 출입문을 달아 기거했다. 사람의 생활에 따른 환경오염과 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필자가 문화재보호구역 지정을 건의해 지정되면서 퇴굴시켰다.

휴양림을 개장하고 책임자로 있으면서 등산로를 더 만들었다. 그때 발견하고 채록한 것이 보재암지와 보잠샘이었다. 보잠샘 석굴 앞 움막도 철거했다. 20년 전에 발견한 곳을 지난해 되찾아 연구 분석한 결과 보재암은 보당암, 보잠샘은 보당암 샘으로 추정해 보당암 근원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금수암과 염불암 역시 어느 고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계속 연구 중이다.

2013년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대견봉 기슭에서 절터를 찾아냈다. 축대 위에서 사각 석수조와 거대한 맷돌을 발견했다. 연구 결과 250여 년 전의 여지도서에 기록된 금천사 절터로 확신하고 있다. 그해 가을에는 또다시 관기성사의 암자 터로 추정되는 절터와 거대한 맷돌을 발견하였다.

2014년에는 비슬산 병풍바위 아래에서 또 절터와 석불좌상을 발견하였다. 안타깝게도 머리와 한쪽 팔이 잘려 나갔지만 어깨에 걸친 불의(佛衣)가 도드라졌다. 불상이 발견되기는 처음이어서 동여비고를 통해 분석한 결과 속성사 절터와 석불로 추정하고 있다.

얼마 전에 또 석탑과 절터를 발견하였다. 농경지 앞에 축대가 정교하였다. 건물지로 보이는 주춧돌, 산등에는 석탑이 자리했다. 석탑은 도굴꾼의 소행으로 깨진 기단부가 흩어졌으며, 낙수면과 우주석 하나가 비탈에 처박혀 있었다. 이 역시 정백사 절터와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고학자 몇 분께 사진을 보내고 비슬산도 동행했다. 대체로 절터와 석탑과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 것이었다. 하지만 사찰 명칭은 발굴이 관건이었다. 천왕봉에도 기와와 도자기 파편은 집중적인데 절터는 묘연하다. 지금껏 발견한 문화재의 호적을 밝혀냈으면 한다. 대견사 장육관음 석상 또한 연귀산의 돌거북처럼 일제가 묻어버렸을까? 부쉈을 것도 염두에 두고 지금껏 헤매 봤지만 역시 행방은 알 수 없다. 발굴 뒤 비슬산을 정비한다면 '삼국유사 문화환경공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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