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드레스메이커

'아메리칸 퀼트'(1995)를 만들었던, 1990년대 여성주의 영화의 대표 주자인 호주의 여성감독 조슬린 무어하우스가 오랜만에 완성한 여성영화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주인공 틸리를 연기하고, 그 외 호주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조연진으로 등장한다.

'드레스메이커'의 원작은 호주의 대표적 여성작가 로잘리 햄의 동명 베스트셀러다. 가상의 마을 던가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이용해 복수한다는 참신한 소재가 바탕인 소설이다. 로잘린 햄은 실제로 재봉사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하여 틸리 캐릭터를 완성했다. 부조리와 유머가 생생한 시각적 소설이며, 영화에는 화려한 색감과 여성적 디자인이 돋보이는 1950년대 오트 쿠튀르 황금기 드레스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여성감독, 연기파 여성배우, 여성작가, 그리고 드레스. 여성들이 고유의 여성성을 발휘하며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전형적인 여성영화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25년 전 소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쫓겨났던 틸리(케이트 윈슬렛)는 어느 날 디자이너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틸리는 화려한 드레스 선물로 자신을 경계하던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 그간 엄마를 돌봐준 테디(리암 햄스워스)와 새로운 사랑도 시작한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틸리는 과거의 사건 뒤에 숨겨졌던 엄청난 비밀을 찾아내면서 마을로 돌아온 진짜 이유를 실행한다.

어린 시절 친구를 살해한 누명을 쓰고 마을을 떠나 있던 틸리는 재봉 실력을 이용해 복수를 계획하지만, 정작 회색빛 마을을 화려하게 변화시킨다. 총을 든 복수가 아니라 재봉틀을 활용한 복수라니, 기발하고 신선하다. 자신을 유배시켰던 마을 사람들의 똘똘 뭉친 이기심을 향한 매서운 복수의 산물이 아름다운 드레스다.

영화는 많은 의미를 던진다. 모녀가 사는 가정에 대한 왕따, 이를 방조하는 교사와 학부모들, 그리고 문제가 터졌을 때 가장 약한 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의 죄책감을 덮는 비열한 이기주의…. 공동체주의가 무너지고 개별화된 인간들이 극도의 이기주의를 발휘할 때, 그 결과가 다시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씁쓸한 원리를 영화는 날카롭게 꼬집고자 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결이 다르다. 전반부는 드레스 디자이너로서 성공한 틸리의 화려한 귀환과 그녀가 원한을 품은 마을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행하는 복수극이며, 후반부는 틸리의 로맨스 드라마다. 사랑에 빠진 틸리가 남자의 여자로서 자신의 지난날 상처를 달래고 행복한 꿈을 꾸는 것은, 복수의 화신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재탄생하는 변신이다.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나 영화적 결의 갑작스러운 전환 문제로 영화가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삐걱거린다.

조슬린 무어하우스의 대표작인 '아메리칸 퀼트'처럼, 여성들만의 공예를 매개로 여성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긍정적인 여성적 연대 안에서 여성적 자아를 완성해 나간다는 서사적 과정은 유사하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다. '드레스메이커' 전반부의 여성들 연대는 후반부에 붕괴한다.

틸리는 무채색의 의상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순응하며 덤덤하게 살아가던 마을 여성들에게 몸매를 드러낸 화려한 원색의 드레스를 만들어 입히면서, 그녀들에게 생의 활력을 선사한다. 외모에 자신감을 가진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접근하고, 부모의 일방적 명령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며 즐겁게 지낸다. 그러나 이러한 틸리의 신나는 노력이 복수를 향해 나아가고 자신의 상처에 집착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휘청거린다. 다양한 캐릭터들, 그리고 주인공이 마을 사람 각각과 맺는 개별적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화롭게 구축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300여 벌의 드레스 향연을 보는 과정은 즐겁다. 무엇보다도 시각성이 빼어난 영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기심과 차별주의, 탐욕과 세속적 가치에 대한 찬양을 날카롭게 비판하기에 영화적 칼날은 다소 무디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비주얼에 비해 서사적 구축이 허술하고, 비판적 메시지나 의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훌륭한 배우들을 캐스팅했지만, 연기파 배우들의 역량이 개인기 정도로 그치며 서로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문제도 드러난다.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감독이 과거의 영광을 재연하려는 야망은 컸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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