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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4일과 '밸런타인 데이'‥초콜릿 선물하는 날? '봉사하는 날' 어떨까

1960년 대 일본 제과업체 상술에서 비롯…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인 건 거의 몰라

사랑을 고백하는 밸런타인 데이를 앞두고 대구 수성구 한 마트에서 소비자가 선물용 초콜릿을 고르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사랑을 고백하는 밸런타인 데이를 앞두고 대구 수성구 한 마트에서 소비자가 선물용 초콜릿을 고르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진 대구가톨릭대 교정. 매일신문 DB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진 대구가톨릭대 교정. 매일신문 DB

'마이 퍼니 밸런타인'(My Funny Valentine)은 남자가 연인에게 애원하는 가사의 재즈곡이다. 외모는 볼품없고, 화술도 세련되지 않지만 헤어 스타일조차 바꾸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매일매일이 사랑 고백을 받는 '밸런타인 데이'가 될 거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더라도 밸런타이 데이에 선물을 챙기지 않았다가는 쓰라린 이별 통보를 받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연인보다 초콜릿 판매업자들이 더 설레는 날이기 때문이다. 강요된 사랑 고백이 넘쳐나는 '웃픈' 세태다.

◆상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축제

밸런타인 데이의 기원에는 초콜릿 이상의 달콤함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남녀를 부부로 맺어주려다 순교한 성(聖) 밸런타인 신부의 축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전쟁에 소집된 병사의 사기 저하를 우려한 로마 황제의 결혼금지령을 어기고 혼배성사를 집전했다가 서기 269년 2월 14일 처형됐다.

죽을 각오를 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던 밸런타인 데이가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둔갑한 것은 1960년대다. 일본 제과업체의 광고 덕분에 초콜릿이 사랑의 매개체로 급부상했다. 한국에는 1980년대 초반 비슷한 풍조가 생겨났다. 최근에는 친구'직장 동료끼리도 초콜릿을 주고받는 수준까지 보편화됐다.

가톨릭 문화가 뿌리 깊은 유럽이나 미국에서조차 이런 형태의 밸런타인 데이 문화는 새로운 풍습이다. 최근에서야 누구나 아는 기념일이 됐다. 특히 유럽에서는 어린이'청소년 사이에 초콜릿 또는 예쁜 카드를 선물하는 날로 자리매김했다.

독일과 미국 대학 강단에 섰던 김중순(62) 계명대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는 "서구에선 밸런타인 데이를 '만들어진 기념일'(made-up holiday)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연인의 날'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기업의 스토리텔링 마케팅으로 탄생한 '새로운 축제'라는 것을 소비자들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밸런타인 데이는 인간이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며 "세계화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밸런타인 데이는 어때요?

밸런타인 데이가 있는 2월은 각종 행사가 많은 달이다. 올해는 각급 학교의 졸업식에다 설 연휴, 대보름(22일)까지 들어 있다. 그만큼 지출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한 결혼정보업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혼 남녀 대다수(남성 89.9%, 여성 77.2%)는 밸런타인 데이 등 '연인의 날'이 없어지기를 바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 응답자의 70% 정도는 이벤트 준비에 대한 압박, 선물 비용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밸런타인 데이 선물로 쓰는 금액은 남성이 평균 8만6천원, 여성이 11만6천인 것으로 조사됐다.

밸런타인 데이의 순수한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를 바꿔보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밸런티어 데이'(Volunteer Day'자원봉사의 날) 행사가 대표적이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 집수리를 해주거나 생필품을 전달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듯, 나눔을 실천하자는 취지다.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날이라는 인식도 퍼지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는 이듬해 2월 14일 열린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1902∼1959) 여사는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란을 와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는 등 지역과도 인연이 깊다. 2011년 문을 연 이 대학의 안중근 연구소 이경규(63'역사학과 교수) 소장은 "밸런타인 데이에 대해서는 알아도 안 의사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 아쉽다"며 "서구 물질문명에 휘둘리지 않는 자존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많아도 너무 많은 기념일들

'믿거나 말거나'인 기념일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다. 매월 14일만 하더라도 ▷1월 다이어리 데이 ▷2월 밸런타인 데이 ▷3월 화이트 데이 ▷4월 블랙(짜장면) 데이 ▷5월 로즈 데이 ▷6월 키스 데이 ▷7월 실버(반지) 데이 ▷8월 그린 데이 ▷9월 포토(사진) 데이 ▷10월 와인 데이 ▷11월 무비(영화) 데이 ▷12월 허그 데이 등으로 명명됐다. '데이 마케팅'은 10대들이 주도하는 기념일이라고 해서 흔히 '포틴 데이'라 부르기도 하며, 1990년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1996년 법정 기념일인 '농업인의 날'로 선포된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날 역시 제과업체의 스토리텔링 마케팅으로 성공한 '축제'다. 1990년대 초반 부산의 여중생들이 숫자 1이 네 번 겹치는 11월 11일에 과자 '빼빼로'를 서로 주며, '빼빼로처럼 키 크고 날씬해지고 예뻐지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해당 제과업체에게 '대박'을 안겨줬다.

이후 정부와 농협이 쌀 소비를 촉진한다는 취지로 이날을 '농업인의 날'로 제정하고 가래떡을 나눠 먹는 행사를 시작했으나 여전히 과자가 '대세'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편의점 업계에 따르면 11월 11일은 1년 중 편의점 매출이 가장 많은 날이다.

이 밖에 '고백 데이'라는 것도 있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을 100일 앞둔 날로, 해마다 9월 17일이다. 이날 고백에 성공해 사귀게 되면 100일 파티와 크리스마스를 한 날에 기념할 수 있어 솔로인 남녀들에게 왠지 모를 기대를 안겨준다.

억지 춘향 격인 각종 데이(Day)의 홍수에 대해 곱잖은 시선이 늘어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일도 아닌 듯하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요한 하위징아가 말한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서 당연한 '권리'라는 주장이다. 김중순 교수는 "농경시대의 전통으로 내려오던 축제일이 디지털시대에 접어들며 점점 퇴색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며 "현대인이 각종 상업적 기념일을 통해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려는 것은 잃어버린 공동체 미덕을 그리워하는 징표"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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