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대구경북 기피 왜?

'설계두(?~645)와 신문왕(?~692) 그리고 최치원(857~?).' 이들은 다르면서 닮았다. 설계두는 삼국 통일(676년) 이전 활동했다. 신문왕은 통일 이후 왕이 된 진골(眞骨)의 왕족이다. 최치원은 신라가 기울던 즈음 삶을 마친, 설계두처럼 6두품(六頭品) 출신이다. 출신과 활동 무대가 달랐다. 그러나 '뼈아픈 좌절'의 공통 경험을 가졌다. 이를 삼국사기는 잘 전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골품(骨品)을 따져 그 족속이 아니면 아무리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다 해도 그 한계를 넘을 수 없네. 나는 서쪽으로 떠나 중국으로 들어가려네." 설계두가 친구 네 사람과 술 마시며 털어놓은 넋두리다. 넘을 수 없는 신분제 벽에 대한 절규였다.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唐)에 가 고구려 정벌군에 합류, 전투 중 삶을 마쳤다. 그의 용맹에 놀란 당 태종은 "우리나라 사람도 죽음을 무서워하여 주저하기만 할 뿐 나서지 못하는데 외국인으로서 나를 위해 죽었으니 그 공을 무엇으로 보답하랴"며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대장군의 직을 내리고 예(禮)로 장사지내게 했다.

신문왕의 천도 꿈 좌절도 있다. 통일 이후 서라벌에 치우친 수도를 달구벌(達句伐'대구)로 옮기려 했다. 장산성(獐山城'오늘의 경산)까지 들러 답사까지 마쳤으나 포기했다. 지배층 반발 탓이다. 뒷날 할아버지 김춘추의 시호 '태종'(太宗)이 당의 시호와 같다며 '하루빨리 고치라'는 당의 요청조차 뿌리쳤지만 기득권 텃세에는 어쩔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당에 유학해 과거 급제, 벼슬, 황소의 난을 진압한 글로 문명(文名)을 떨친 젊은 최치원은 조국을 위한 포부를 펴려 귀국했다. 그러나 '말세 인심이라 시기가 많고…나가는 길이 평탄치 못하고 움직이면 허물만 생기므로 불우한 신세를 슬퍼한 나머지 다시 벼슬살이할 생각을 버렸다'. 그 역시 기존 사회 체제의 벽에 좌절한 셈이다.

해마다 떠나는 젊은이로 고민이 큰 대구경북에 온 공공기관의 입주민이 다른 곳보다 적다고 한다. 정부가 전국 혁신도시 이전대상 115개 공공기관 중 이전을 마친 100곳의 이전 주민 수와 지방세수 등을 분석한 결과다. 대구경북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겨운 말과 달리 기득권층이 폐쇄적이다. 고향, 학교, 혈연 심지어 종교, 정당까지 따져 '밀당' 한다. 공직사회는 더하다. 같은 경상도라도 차별한다. 혹 공공기관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고 입주를 망설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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