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 通] 올림픽 축구대표팀 신태용 감독

"영덕 '촌놈'이 한국축구 '난놈' 됐죠…리우 골문도 흔들겠습니다"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대구경북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신태용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경남 사천 공설운동장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81년 영해초등학교 운동장. 신영수 교사의 눈에 놀라운 장면이 포착됐다. 3학년 꼬마가 5, 6학년은 물론 중학생 형들까지 제치며 드리블을 하는 것이었다. 키가 두세 뼘은 더 큰 형들도 꼬마의 발재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며칠 후 꼬마는 그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학교 축구부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그땐 아무도 몰랐다. 그 아이의 발끝에서 대구경북의 축구 신기록이 쏟아져 나오고, 한국 축구의 새 장이 열릴 줄은. 그 아이가 현 올림픽 축구대표팀 신태용(46) 감독이다.

신 감독과 인터뷰를 추진하면서 좀처럼 스케줄이 잡히지 않았다. 빽빽한 축구협회 공식 일정이 그와의 접견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신 감독이 축구선수인 아들(재원)의 경기 관람을 위해 경남 사천으로 향한다는 연락이 왔다. 경기 전에 인터뷰가 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 카메라를 챙겨들고 급히 사천으로 차를 몰았다.

◆일본전 역전패에서 큰 교훈 얻어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결승전에서 아쉬운 2대3 역전패. 인터넷에도 무려 300여 건의 기사가 그날 경기를 성토하고 있었다.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 질문을 피해갈 수도 없었다.

신 감독이 담담하게 그 질문을 받았다.

"당시 우승이 목표였다면 2대0에서 '잠금 모드'로 갔겠죠. 그러나 다른 감독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전에 나서면 마음 자세가 조금 격해집니다. 초반에 리드를 잡으면서 5대0으로 확실히 꺾어버리겠다는 욕심을 부린 거죠. 어처구니없는 역전패를 당하면서 감독이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결승전에서 큰 점수 차로 일본을 꺾었다면 국민 영웅으로 환호를 받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덕(?)에 선수 기용에 더 고민하고 경기 운영을 더 숙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축구 팬들의 관심사가 돼 있는 '와일드카드'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아직까지 특정 선수를 정해 놓은 건 없습니다. A대표 선수 가운데 뽑을 계획이지만 공격수, 수비수, 미드필더 등 특정 포지션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구공고 전국대회 첫 우승 견인

누구나 한 번씩 거쳐 간다는 벤치 신세. 어린 태용에게 벤치는 '남의 일' '남의 공간'일 뿐이었다. 형들을 제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를 차고 들어갔다. 모든 승부가 꼬마의 발끝에서 나오니 그를 뺄 수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그를 잡기 위한 경쟁은 학교, 지방자치단체 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중학교 3년 동안 전학을 세 번이나 다녔어요. 전국 체전이나 학교 성적을 위해 불려다닌 거죠.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당시엔 학교, 자치단체 간 변칙 스카우트가 치열하던 시절이었어요."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거치며 신 감독이 최종 둥지를 튼 곳은 대구공고였다. 부푼 꿈을 안고 꿈을 막 펼치려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선배들의 혹독한 기합과 얼차려였다. 팀워크나 위계질서를 위해 필요악이라고 하지만 어린 태용에게 거의 매일 가해지는 단체 기합은 어느덧 그의 인내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번은 1학년 14명이 단체로 숙소를 이탈한 적이 있어요. 밀양으로 도망갔다가 부모님들께 붙들려 흠뻑 야단맞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죠."

이런 해프닝을 거치면서 신태용은 어느덧 전국구 선수가 되어 있었다. 언론도 그의 발끝을 따라다녔다. 고3 때 드디어 청소년대표로 선발되면서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플레이에 물이 오른 신 감독은 그해 전국대회에 나가 중원에서 공수를 조율하며 대구공고를 전국대회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팀 창단 후 첫 우승이었다.

◆1991년 대통령배 영남대 우승 주역

고교전국대회 MVP에 오르면서 각 대학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법석을 떨었다. 프로구단들도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몸이 달았다. 귀가 솔깃할 정도의 유혹도 있었지만 고심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감독에 대한 보은과 친구에 대한 의리였다. 친구 두 명과 같이 입학하는 조건으로 영남대 진학을 결정했다.

영남대에 진학해서도 그의 플레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미드필더에서 공수를 능란하게 지휘해 '꾀돌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동물적인 감각과 지능적인 패스로 완급을 조절해 '그라운드의 여우'라는 별칭이 그를 따라다녔다.

영남대 1학년 때 이미 U19 청소년대표에 선발되었고 4학년 때 올림픽 대표 주전으로 국제무대를 누볐다. 1991년 대학, 실업, 프로2군이 뛰었던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는 2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을 전국 정상에 올려놓았다. 역시 영남대 축구팀 창단 이후 첫 트로피였다. 영남대 졸업 후에는 박종환 감독의 요청으로 일화(성남FC)에 몸담았다.

◆13년간 'K리그의 전설'로 자리매김

신 감독의 어록 중 '난놈'이라는 수사가 있다. 성남을 아시아챔스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뒤 스스로를 지칭한 말이다.(물론 그는 언론에 의해 편집된 표현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진의(眞意)가 왜곡된 표현이라 쳐도 신 감독이 K리그에서 이룬 업적을 평가한다면 '난놈'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선수 시절 성남에서만 13시즌을 뛰며 팀을 6번이나 K리그 정상에 올렸다. '베스트 11' 9회 수상, MVP 2회 선정, 신인왕(1992), 득점왕에도 수없이 이름을 올렸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타이틀을 거머쥐며 그는 어느새 'K리그의 전설'이 되었다.

신 감독은 지도자가 되어서도 남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형님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어 성남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ACL) 정상에 등극시켰고 FA컵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무엇보다 '올림픽 8회 연속 진출' 기록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K리그의 전설에서 올림픽 대표의 사령탑까지. 외견상 신 감독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축구의 비주류였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K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도 지방대 출신이라는 벽에 부딪혀 A매치 주요 경기에서 소외됐고 2002년 월드컵 때도 끝내 러브콜을 받지 못했다. 한때 그는 자신의 지방대 선택을 자책하기도 했다.

신 감독의 오늘의 스포트라이트가 더 돋보이는 것은 그가 비주류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핸디캡을 벗고 축구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는 점이다.

"영덕 '촌놈'으로 태어나 한국 축구의 '난놈'이 되었으니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멋진 경기를 펼쳐보이겠습니다. 저는 '될놈'이니까요."

◆신태용 감독이 걸어온 길

1970년 영덕 출생으로 영해초교, 경북대사대부중을 거쳐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3학년 때 대구공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고 대회 MVP가 되었다. 영남대 진학 후 역시 팀 창단 최초로 전국대회 우승을 일구었다. 1992년 성남 일화에 입단해 2004년까지 13년간 '원클럽맨'으로 활약했다. 신인왕, 득점왕, 어시스트, 베스트 11, MVP에 오르며 'K리그의 전설'로 통한다. 성남 일화 감독을 거쳐 현재 국가대표팀 코치 겸 U23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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