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저 야윈 어깨를 열어보지 않았다./ 창틀은 내내 얼어붙어 있었다./ (중략) 자기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뒤돌아선 그마저도/ 닫혀 있는 어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략) 지우려 할 때 지우려 했던 것만이 가장 선명했다/ 빠르게 기억으로 돌아가려는 듯이/ 모든 것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한동안 사용했던 공용어는 사라지고 절벽이 하나 새로 생겨났다/ 마른 허공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다른 말들이 절벽을 지우며 들려왔다/ 실핏줄이 모여들어 검은 눈동자를 만들고 있었다.(김태형의 '고백이라는 장르' 전문)
'섬세한 감각'과 '존중을 알아버린 시선'을 통해 '안과 밖을 데어본 흔적'을 읽어내는 힘을 가졌다는 시인 김태형. 그가 만들어내는 삶의 풍경은 이채롭다. 어렵게 찾아본 그의 이력에는 웹진과 웹사이트 기획 및 제작과 관련된 다양한 시도들로 채워져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웹과의 만남이 시를 쓰는데 역효과가 났다고 하면서도 네트워크 시대를 시로 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1992년에 계간 '현대시세계'를 통해 등단을 했는데 22살의 젊은 나이에 시인이 된 셈이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고려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것을 생각하면 등단하고 나서 오히려 시 공부를 더욱 절실하게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삶이 시로 나타나는 것이지 대학이라는 공간을 반드시 살아가야만 좋은 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고백'의 사전적인 의미는 '숨긴 일이나 생각한 바를 사실(事實)대로 솔직(率直)하게 말함'을 뜻한다. 고백이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고백은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소통의 방식이고 '곁'을 만들어가는 풍경이다. 하지만 '편'의 힘만이 가득한 세상은 고백이 지닌 힘을 냉정하게 죽인다. 남는 것은 온통 '검은 눈동자'뿐이다. 2016년 내 삶의 화두를 '화쟁(和諍), 길항(拮抗)'이라는 단어로 설정했다. 대립, 갈등, 경쟁, 다툼, 시기, 질투 등으로 얼룩진 21세기 여기의 풍경에 대한 대안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언어로만 말하고 있었고, 저기에서 여기를 진지한 이해로 조망하려 들지 않았다. 말이 되지 못하고 쓰러지는 수많은 내면의 언어들이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내가 열려고 시도한 수많은 '창틀은 내내 얼어붙어 있었다'. 소통은 여전히 불통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되었고, 논리는 말로 살아나지 못하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지배의 소리에 묻혀 버렸다. '공용어는 사라지고 절벽'만이 앞을 가로막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 반응이 다양했다. 먼저 달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을 고백으로 받아들이면서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행위 속에서 다른 의도를 유추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당황스러운 것은 달을 해라고 우기는 사람이다. 일단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사람들이다. 달의 본질을 알아야 하는 사람, 달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때는 특히 쓸쓸했다. 시간의 흐름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변하는 인간의 모습,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시대의 모습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둠을 데리고 더 큰 어둠 속으로 다시 허물어지'거나 '캄캄한 벽 쪽으로' 한없이 무너진다. '구겨진 마음에 와 닿는 내 안의 길 하나'가 길을 만들고 '우리 서로 물방울처럼 투명하게 맺힐 수 있다면, 서로에게 제 얼굴만큼 비춰질 수 있다면'(김태형의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중에서) 얼마나 좋을까.
김태형이 20대 중반에 쓴 '노란 잠수함'이란 시를 좋아했다. 그는 '아아 이제 이 흔들림은 너무나도 편안하다'고 고백했다. 그를 흔들었던 삶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나이를 먹으면 흔들림은 이제 없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40이면 불혹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훌쩍 나이를 더 먹은 지금에도 자주 흔들린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고백이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조차도 이제 편안하다는 20대 김태형이 부럽다. 흔들리는 내가 힘들고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전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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