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은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는 것입니다. 뿌리는 대로 거둡니다."
이상춘 ㈜에스씨엘 대표이사 회장은 '나눔 전도사'다.
김천 산골의 빈농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자신의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돈을 벌기 위해 단돈 500원을 들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어린 자식을 객지로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복받친 눈물을 몰래 지켜본 이 회장은 '반드시 성공해 나처럼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는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37년 만에 장학재단 설립으로 이를 실천했다. 자신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사들인 건물 4동을 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선뜻 내놓았다.
그는 남들이 학업에 전념할 때 창고 같은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장에서 일했고, 남들이 직장에 다닐 때 사업을 하면서도 야간 고교를 거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부도위기에 내몰린 회사를 기적적으로 살려낸 뒤 특유의 믿음과 성실함으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곳에서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을 학생과 노인, 어려운 이웃을 위해 씨를 뿌리듯 나눔을 위해 내놓고 있다.
어릴 때 집안형편이 어려우면서도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보따리장수도 하룻밤 재워 보내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나눔의 싹'을 키웠고, 자수성가한 뒤에는 나눔의 삶을 줄기차게 실천하고 있다.
◆눈물 삼킨 500원
1971년 중학교를 졸업한 이 회장은 고교 입학시험 1주일을 앞두고 서울로 떠나야 했다. "시험이라도 치르고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시험에 합격한 뒤 떠나면 마음이 더 아프다. 네가 고교에 가면 동생 4명을 중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서울 가서 돈 벌어라"고 했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날 아버지는 연신 담배만 피웠고, 어머니는 밤새 낮은 소리로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용돈으로 받은 500원을 움켜쥐고 출발할 서울행 버스 안에서 전날 어머니의 울음을 되새기며 결심했다.
'다시는 가난 때문에 부모님이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서울 가서 사업에 성공하겠다. 또 돈을 많이 번 뒤에는 나처럼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꼭 만들겠다.'
서울에서 종조부가 운영하는 볼펜 스프링 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처음에는 기술을 배우기보다 잔심부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 같은 좁은 방에서 7, 8명이 모로 누워야 하는 기숙사 생활을 견뎌냈다. 6년 동안 고된 공장생활을 익혔고, 그해 종조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면서 공장을 나와 독립했다.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사선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1977년 그동안 배운 기술력을 바탕으로 용산에 '대신스프링' 회사를 설립했다. 현 에스씨엘의 모태 회사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창업 3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오일쇼크였다. 자금 유동성이 휘청거렸다. 연 60%에 달하는 사채 이자에 죽을 고생을 했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긴 뒤 회사는 조금씩 성장했다. 하지만 2002년에 결정적 위기를 맞았다. 결제 어음이 한꺼번에 돌아오면서 회사는 파산 직전으로 내몰렸다. 당장 막아내야 할 어음이 2억4천만원. 집과 공장은 이미 2중, 3중으로 담보가 잡힌 상황이었다. 은행 대출로 막기에는 금액이 너무 컸다. 자살까지 생각했다. 하나님을 찾았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만약 살아나 재기를 하면 100억대의 장학재단을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기도가 받아들여졌는지, 뜻밖의 구세주는 은행 지점장이었다. 그동안 그의 성실성과 사업능력을 인정해 큰돈을 대출해준 것이다. 파산은 막았지만 부도 직전에 몰리면서 일감이 끊기고 공장은 멈춰 섰다. 다행히 2년 전부터 준비해오던 일본 기계부품 판매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6년 만에 빚을 모두 갚고, 다시 상승기에 접어들었다. 이때 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였다. 적금을 해지하고, 퇴직금을 정산한 뒤 어음을 발행하지 않았다. 대신 은행 대출 등으로 부도난 50년 역사의 경쟁업체를 인수하면서 성장의 획기적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해마다 공장을 사들일 만큼 승승장구하면서 경기도 부천의 본사 외에도 경기도 화성, 충남 당진, 중국 톈진에 공장을 설립했다. 자동차 패드 스프링핀 부품 국산화에 성공한 것을 비롯해 핸들 조향장치, 제동장치, 충격완화장치 등 자동차 부품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를 위한 삶에서 나눔의 삶으로
IMF 이후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경제도 또 한 번 휘청거렸다. 모두가 어렵다고 할 즈음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이 회장은 15세 때 김천에서 서울로 떠나올 때의 결심을 실천했다. 김천 출신 학생들에게 학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할 수 있도록 105억원을 출연해 '상록수장학재단'을 만들었다. 이 재단은 단순한 장학금 지원에 그치지 않고 수련회 등을 통한 인적 네트워크 형성, 후배 학생들에 대한 멘토 등 역할을 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단 설립 8년째인 지금까지 학생 1천600명에 대해 23억원가량을 지원했다.
재단 설립 2년 뒤 2010년 사업이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자식들이 독립해 나가면서 '나를 위한 삶'에서 '나누는 삶'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됐다. 태국, 중국, 필리핀 등지 오지나 미얀마 난민수용소 등에 학교를 지어주는 등 해외봉사활동에 나섰다.
또 국내에서는 의미 있는 단체나 사업에 매년 1억원씩 기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기부도 사업성과를 보고 연말에 할 게 아니라 아예 1월 초에 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국립암센터, 소아암센터, 평화통일세움재단, 고향인 김천인재육성재단, 모교인 숭실대 등지에 1억원씩 기부했다. 2012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 받은 조의금 1억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권유에 따라 보건복지부 기부자조언기금 1호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기부한 돈이 7년 동안 8억원에 달했다.
그는 "기부나 봉사는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며 "담배나 술, 커피를 하지 않으면 하루 1만원은 모을 수 있고, 이것을 1년 동안 모으면 365만원으로 소중한 기부의 밑천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억원 이상 기부자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를 예로 들면서 "돈 많은 사람들만의 모임인 줄 알지만 환경미화원 부부, 작은 식당 하는 사람, 점심값이 아까워 김밥 먹는 사람들도 이 모임에 있다"며 "그렇게 어렵게 모아서 기부한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 보이더라"고 했다.
◆불붙이는 '나눔 2000운동'
이 회장은 지난해 재경 김천향우회 회장을 맡으면서 새로운 나눔운동을 펼치고 있다.
우선 지역 출신 경제인 50명으로부터 200만원씩 거둬 1억원으로 봉사단체 '드림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나눔철학 실천에 나섰다. 나눔이나 봉사는 돈 많은 소수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조금씩 하면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철학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향 어르신들에 대한 봉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빨이 좋지 않은 노인, 무릎이나 관절이 나쁜 노인들에게 치료나 수술비 등을 지원하겠다는 생각을 향우회 회원들과 공유한 뒤 지난달부터 본격적인 나눔활동에 들어갔다.
바로 '나눔 2000운동'이다. 한 사람당 월 5천원씩 내는 회원을 2천 명 모으겠다는 것이다. 벌써 1개월 만에 150명이 등록하는 등 이 운동이 고향 김천과 재경 김천향우회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이 회장은 향우회 집행부, 상록수장학금이 전해진 학교의 교사, 고향 공무원, 회사 임직원 등지로 '나눔 2000운동' 확산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며 "나눔문화가 확산돼야 사회가 따뜻해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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