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진박'<眞朴>의 말로는?

"이제 완전히 찬밥 신세야!"

오래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분은 이른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권 실세'였다. 술이 약간 취한 탓인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 탓인지, 그분은 신세타령을 늘어놨다. "(대통령 모시고) 신나게 달려왔는데 이제는 종쳤다." "내 덕을 본 인사가 한둘 아닌데, 정권 놓고 나면 누가 찾아오겠나?"는 뉘앙스였다. 동석자들은 정권 실세의 거침없는 토로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었다. 필자는 내심 '그만큼 행세했으면 됐지,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 저럴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은 5년간 제대로 권력을 누렸고, 정권이 바뀌고 나니 감옥에 갔다. 자신의 운명을 그 당시에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권 때의 에피소드인지 밝히면 그분이 누구인지 대충 알 것이기에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정권 실세'라는 자리 아닌 자리는 대단하긴 대단했다. 필자는 노태우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까지의 정권 실세를 두루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권을 잡기 전만 해도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정권 실세가 되면 그분의 '아우라'부터 달라지기 마련이다. 얼굴에서 빛이 나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장난이 아니었다. '예전에 봤던 그분이 맞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먼저 뛰어와 안면을 트려 하고, 사람마다 굽실굽실하니 세상을 전부 얻은 듯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재미만 따지자면 대통령보다 권력 실세가 훨씬 낫다. 대통령은 적막한 청와대에 틀어박혀 국가 현안과 씨름하지만, 권력 실세들은 대중의 눈을 피해 밤낮없이 권력의 달콤함을 만끽했다. 온갖 이권과 청탁, 자리 부탁이 넘쳐나다 보니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다. 그렇다 보니 역대 정권의 실세들은 화끈하게 즐기다가 결국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감옥에 갔다. 파티가 끝난 뒤에 말로가 비참해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권 실세 혹은 실력자와 관련한 주관이 확고하다. 자기 분수에 넘치게 행동하는 측근을 절대 인정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 눈치를 보며 자가발전하는 것인지, 대통령 용인하에 하는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행세하는 분이 몇몇 있다. 대통령은 인정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시중에서는 이런 분들을 '정권 실세'라고 부른다. '진실한 사람'인지 '진짜 친박'인지 헷갈리는 '진박'(眞朴)을 기획하고 띄우려고 하는 세력이 이런 분들이 아닐까.

출마 예정자나 정치권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청와대 실세 비서관과 최경환 의원 등 몇몇 분이 '진박'을 모으고 띄우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몇몇 친박 의원들이 조연 역할을 맡아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이번 총선에서 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국회의원들을 쫓아내고, 현 정부의 국정 운영을 도울 수 있는 국회의원들을 세력화하려는 의도는 그리 나쁜 짓이 아니다. 실세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한 번쯤 시도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결과가 영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진박 가운데 극히 일부만 살아남을까, 나머지는 생존 확률이 희박해 보인다. 정권 실세들이 지역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은 오만과 독선에 젖어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디 그들뿐일까? 친박계 중진들이 유승민 의원 부친상에 와서 'TK물갈이론'을 떠들고 당내에서 비박(非朴)들에게 비수를 꽂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오만하고 기고만장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한구 공관위원장도 공천 심사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걸 보면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박근혜정부는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당장 내년이면, 혹 총선이 끝나면 '친박' '진박'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지 모른다. 파티의 끝이 슬슬 보이는 시점이다. 정권 실세나 친박 중진들이 겸손한 모습을 보이거나 자중자애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