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선물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어느 날 까까머리 중3 소년의 손에 생일선물로 주식 계좌가 하나 주어졌다. 물론 실제 돈이 아닌 모의투자였다. 이렇게 시작된 주식투자는 그 소년의 삶을 바꿔 놓았다.
대학 입학 후 성인이 된 박철상(경북대 정외과 4년) 씨는 주식현물투자에 뛰어들었다. 13년 동안 꽤 많은 돈이 모였다. 단 한 번도 액수를 밝힌 적이 없지만 수백억원으로 추정된다. 어려움에서 벗어나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세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또래의 학생들이 생활고 때문에 꿈을 접고 기회를 빼앗기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박 씨는 통장을 열고 지갑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백억 자산가에서 자선가의 길로 들어선 박철상 씨를 만나보았다.
◆장학금·기부로 이끈 '두 사건'
20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모으며 스스로 그 성과에 우쭐해있을 것 같았던 박 씨. 그는 소년등과(登科)의 자만을 경계하며 부(富)의 분배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기부에 나서기에 20대는 너무 어렸고 40, 50대쯤 본격적으로 나눔에 나설 생각이었다. 2013년 한 경북대생의 죽음은 그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 후배는 생활고 속에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던 학생이었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모범생이었다. 이 사건은 경북대 '정외과 장학기금'이 태어난 계기가 되었다.
"내가 기부를 미루는 사이에 학생들이 저렇게 잘못되어갈 수 있구나. 오해의 시선들이 두려워 기부를 늦추려던 저 자신을 많이 반성했어요. 그 길로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2014년 4월에 일어났던 세월호 사태도 그의 기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고 후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던 박 씨는 봉사활동 과정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죽음 직전에서 조끼를 벗어준 학생들과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현장에서 장학기금을 크게 늘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죠."
대구에 돌아온 그는 복현장학기금, 꿈지기장학기금(경북여고), 누리나래장학기금(서부고), 사탑장학기금(사범대), 법주장학기금(법전원)으로 금액을 늘려 갔다. 어린 학생들에게 기부를 집중하는 이유는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나중에 자신이 받은 혜택만큼 사회에 내놓는, '선순환'하길 바라는 마음도 작용했다.
◆기분문화 확산에 도움되길
기부 선행이 알려지면서 박 씨에게 방송, 신문, 출판사, 기업체 특강 등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대부분 거절했다. 유명세만큼 오해도 적지 않았다. '이 사람이 다른 장삿속이 있나?' '정외과라는데 출마하려는 것 아냐?' 등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2015년 박 씨는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을 계기로 이제까지 견지해온 '익명 모드'를 접었다. 제한적이나마 방송이나 매체 노출을 시작한 것이다.
"제가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고 나서 지역에서 두세 분이 제 뒤를 이었다고 해요. '저렇게 어린 친구들도 하는데 나도…' 하며 마음 문을 열었다는 겁니다. 제가 인터뷰에 응하기로 한 것은 기부문화가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기부가 작은 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가지들이 수천, 수만 가지로 뻗어나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거죠."
박 씨가 지향하는 기부문화는 민주주의 투표와 비슷하다. 모든 국민이 빈부귀천을 떠나 1인 1표 등가(等價)이듯 기부도 액수를 떠나 나누려는 마음이 소중하다는 의미다.
◆10원도 새지 않고 수혜자에게 전달
8년째 접어든 박 씨의 기부총액은 현재까지 약 15억원에 달한다. 앞으로 지갑을 더 열어 40년간 장학사업을 펼쳐갈 생각이다.
박 씨는 기부가 전시행사나 요식행위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초창기 인터뷰나 사진촬영에 극히 인색했던 이유에 대한 해명이다. 그에게 기부의 큰 원칙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기부금이 10원짜리 하나까지 모두 수혜자들에게 도달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기부의 목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전달과정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재단 출연 방식은 기금운영에 고정비가 많아서 학생들에게 혜택이 온전히 돌아가기가 힘듭니다. 저의 장학금 선정, 전달 과정은 교수님, 선생님, 대학원생, 교직원들의 모두 자발적인 희생과 봉사로 이뤄집니다."
이런 원칙이 유지되기 위해 혹사를 강요당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 씨 자신이다. 올해를 기준으로 매년 새로이 선발되는 장학생의 수가 300여 명. 박 씨는 이 모든 학생의 심사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서류를 검토하고 면접을 보고 제출한 에세이도 모두 읽어본다. 밤잠을 줄여가며 여기에 시간을 쓰는 것은 통장의 돈이 밖으로 나가 어린 학생들의 꿈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대충대충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뒤에는 '버핏 어머니'가 있었다
젊은 청년이 자만에 빠지지 않고 기부, 자선 계획을 묵묵히 펼치는 데에는 박 씨를 든든히 받쳐준 자양(滋養)이 있었다. 바로 부모님이다. 2003년 가세가 기울면서 어머니는 월급 60만원짜리 사내식당에 일을 나갔다. 박 씨에게 여유가 생기면서 어머니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사정을 했지만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제가 이룬 부(富)에 취해서 교만에 빠질까 봐 어머니가 몸소 가르침을 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힘들게 돈을 버신다는 생각에 전 다른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은 한사코 생활비를 받지 않다가 재작년에 아버지가 퇴임을 하면서 아들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더 이상 무리하면 손목과 어깨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지난달에야 일을 그만두었다. '청년 버핏' 박철상 씨가 이렇게 대구의 훌륭한 청년으로 자란 데에는 '버핏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인터뷰는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한두 시간 짬을 내기 힘들 정도로 일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데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박 씨의 성격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용기를 낸 이유는 단 하나. 기부문화의 확산이다. "제가 경북대에서, 지역 고교 몇 곳에서 작은 불씨를 지피겠습니다. 이 씨앗을 받아 많은 분들이 지역에서 기부의 꽃을 활짝 피워갔으면 좋겠습니다."
※박철상 씨가 걸어온 길
1984년 대구에서 출생. 2004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12년째 재학 중이다. 중3 때 모의 주식투자로 주식을 시작한 후 오랜 투자경력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2013년 '정외과 장학기금' 설립을 시작으로 사탑장학기금(사대), 법주장학기금(법전원), 복현장학기금, 경북여고'서부고장학기금 등을 설립해 7년간 15억원을 사회에 기부했다. 2015년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년간 3억6천만원을 기부하면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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