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변호사 윤학, 그는 흔히 말하는 '세상사는 요령'을 따르지 않는다. 수를 부리지도, 돈을 좇지도 않는다. 어린 시절 가난하지만 행복했다는 그의 바람은 하나, 우리 마음속의 순수함이 살아나 우리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변호사로 성공했지만 2007년 이래 더 이상 변호사 일은 하지 않는다. 대신 서울 강남의 법조타운 한가운데에 문화공간을 지은 후 오페라 등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또 부인과 함께 갤러리와 출판사를 운영하며 와 를 발행하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신안의 한 작은 섬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때 홀로 광주로 나와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와 그 대학원을 나왔다(법학박사).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등의 수필집이 있다.
변호사를 그만두고 문화기획에만 매달리게 되던 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는 그를 그의 에서 만났다. 진공관 앰프의 오디오와 아름다운 원목 테이블이 있는 방에서였다.
김병준: 시설이 대단하다. 개인이 이 정도의 시설을 세워 운영한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서울 강남의 한가운데에.
윤학: 450여 객석의 공연장인 화이트홀이 있고 200개 가까운 객석의 아트홀이 있다. 그리고 갤러리와 서점, 와 를 만드는 출판사 등이 있다.
김병준: 물려받은 돈이 많거나, 아니면 변호사로 많이 번 모양이다.
윤학: 물려받은 것은 없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몇 시간 들어가야 하는 섬에서 자랐다. 방 하나에 8남매가 포개어 자기도 했다. 변호사가 되고도 한동안 작은 전셋집에서 살았다.
김병준: 결국 변호사로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윤학: 솔직히 잘 벌었다.
김병준: 판검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전관예우 같은 것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윤학: 첫 수임사건 이야기를 해 보자. 개업 후 한 달간 손님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머니 두 분이 찾아왔다. 남편들이 큰 장사를 하다가 같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이들을 꺼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바로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다고.
김병준: 그런 경우 대체로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것 아닌가? 더욱이 첫 손님인데….
윤학: 그런데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분들이 사건을 맡겨 주었다. 장사를 오래 해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했다. 법무장관 출신 등 다른 변호사들은 다들 돈만 좀 쓰면 나올 수 있다고 하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란다. 기뻤다. 진심이 법무장관 출신을 이긴 것이다. 열심히 했고, 다행히 결과도 좋았다. 그랬더니 이분들이 다른 사건을 소개해 주고…. 이런 식으로 커졌다.
김병준: 진심과 열정이 '줄'이나 '전관예우'보다 강할 수 있다는 말 아니냐.
윤학: 브로커도 고용하지 않았다. 브로커를 쓰면 사건이 많이 들어온다. 하지만 이들과 수입을 나누어야 하고 손님 접대도 해야 한다. 사건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들을 쓰지 않으면 적은 사건에 보다 집중할 수 있다. 그러면 승소율이 높아지고 성공보수도 그만큼 더 많이 들어온다. 흔히들 말하는 '세상사는 법'의 반대편에 오히려 성공의 길이 있었다.
김병준: 그래도 그렇지, 이 큰 시설을 짓고 운영할 정도로 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윤학: 사실은 다른 길을 통해서도 돈이 들어왔다.
김병준: 어떤 길?
윤학: 돈의 논리로만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 내 경우에는 성경대로 되더라. 성당에 나가는데 누가 가톨릭 잡지를 보여주며 거기에 글을 써보라고 했다. 그리 좋아 보이는 잡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썼다.
김병준: 여러 번 계속 쓴 모양이다.
윤학: 그랬다. 그런데 이 글을 본 신부님이 내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잡지를 아예 인수해서 운영해 보라 했다. 망해 가는 잡지를 왜 맡느냐 했더니, 신부님 말씀이 그러니 맡으라는 것 아니냐 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김병준: 그게 ?
윤학: 그렇다. 하지만 인수 후 너무 힘들었다. 아내와 같이 새벽 4, 5시까지 글을 쓰고 편집을 했다. 고시 공부는 저리가라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했다. "유명한 사람을 필진으로 모셔라." "광고를 따 와라." 내가 무슨 능력으로 그렇게 하겠나? 또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 싫었다. 오로지 내용으로 승부를 내자고 했다. 그랬더니 독자가 한 사람 두 사람 늘어가더라.
김병준: 인수 당시 몇 부나 나가고 있었나?
윤학: 지금은 약 7만~8만 부 나간다. 하지만 그때는 불과 500부, 수입은 월 80만원 정도였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이 가리라 믿는다. 변호사 수입의 상당 부분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김병준: 기적?
윤학: 잡지를 아끼는 신자 한 분이 도움이 될 거라며 어느 기업의 지방 소재 부동산을 소개했다. 하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지역에 평신도 강론을 갔다가 그 기업의 임원을 만나게 되었다. 잡지와 가톨릭 이야기로 4, 5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이야기 끝에 그 임원이 이 부동산을 꼭 사라고 했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국 융자를 내어 샀다. 부동산 투기꾼이 된 것이다.(웃음)
김병준: 그게 돈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그걸 처분해 이 센터를 지은 것인가?
윤학: 아니다. 잡지가 좋아지면서 변호사는 그만두더라도 잡지는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 소유의 사무실이 갖고 싶어졌다. 임대 사무실은 자정이 되면 나가라고 재촉을 하는 등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러던 중에 IMF 위기가 왔고, 그 바람에 이 블록의 원하는 땅을 융자와 임대수입 등으로, 즉 내 돈 크게 들이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김병준: 그런 걸 두고 재운이라 한다.
윤학: 운이 아니라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잡지를 맡지 않았다면, 또 잡지에 애정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이 생겼겠나? 그래서 성경대로 되더라고 말했다.
김병준: 음악과 미술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
윤학: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어릴 때부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힘, 사랑의 힘 같은 것들이 좋았다.
김병준: 어릴 때부터라면?
윤학: 섬에 살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차린 작은 술상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자식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 속에 따듯한 마음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별빛은 쏟아지고, 모여 앉은 사람들은 어머니의 음식을 칭찬하고….
김병준: 말하는 표정에 그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보인다.
윤학: 하지만 곧 세상이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알았다. 광주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입학시험 치는 날 운동화를 도둑맞았다. 그 뒤로도 10켤레쯤 도둑맞았다. 어머니가 안타까워하셨다. "운동화 하나 지킬 요령도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겠나?"
김병준: 어렵게 사 주신 것일 텐데.
윤학: 어느 날 자취방에 박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떻게 세상이 이럴까? 그러다 뭔가 떠올랐다. 스스로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래, 요령 부리며 사는 인생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인생도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살면 된다."
김병준: 나이 들어서도 계속 그런 생각을 했나?
윤학: "세상에는 두 가지 가치, 즉 내가 가지면 상대가 못 가지는 경쟁가치가 있는가 하면, 나와 다른 사람이 모두 가질 수 있는 비경쟁가치가 있다." 고시 공부 막바지에 읽은 책에서 본 내용이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뺏고 빼앗기는 경쟁가치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종교'예술'문화와 같이 주고 또 주어도 여전히 남는 비경쟁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도 있다고.
김병준: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살다 보면 어느새 뺏고 빼앗기는 삶 속에 있다.
윤학: 그랬던 것 같다. 변호사 생활 10년쯤 했을 때였다. 집으로 들어오다가 달을 봤다. 고향에서 봤던 그 달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어느새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있었다. 이게 아닌데….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
김병준: 그리고 그 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를 인수하고, 지방소재 부동산을 사고….
윤학: 그러다 1990년대 중반, 평소 우상으로 여겼던 음악인이 연출한 공연을 보러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부자는 나쁜 사람, 가난한 사람은 이들로 인해 불행한 사람…. 그런가? 어린 시절에는 힘들게 살았어도 행복했다. 문화와 예술까지 이렇게 이념적이고 선동적이어야 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나도 아내도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가 공연장 하나 지읍시다."
김병준: 그래서 이 센터의 이름이 '흰 물결'인가?
윤학: 흰 물결은 곧 순수한 사람의 마음, 또 그런 마음의 흐름이다. 순수한 힘, 사랑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투쟁적이고 선동적인 것보다 더 세다.
김병준: 그런 마음에서 시작했으니 공연의 내용이나 형식도 좀 다를 것 같다.
윤학: 음악이나 미술은 가장 귀한 것들과의 만남이다. 이를테면 시는 우리 영혼의 숨결이다.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며 우리는 이런 귀한 것을 만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 귀한 만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김병준: 무슨 말인가?
윤학: 공연하는 사람은 한 수 보여주겠다는 태도를 보이기 일쑤고, 보고 듣는 사람 또한 이런 자리에서 이 정도의 문화를 즐기는 수준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데 더 신경을 쓰곤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순수한 마음으로 보여주고 들려주고, 또 보고 들어야 한다.
김병준: 나 자신, 찔리는 부분이 있다.
윤학: 여기서는 가곡도 오페라도 우리말로 한다. 전달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거짓말이라 하겠지만 부르는 사람도 그 뜻을 모르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듣는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는 제대로 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병준: 우리말 가사는 누가 만드나?
윤학: 부족하지만 많은 부분을 내가 한다. 잡지와 단행본 등으로 글을 쓰다 보니 언어감각도 는 것 같다.
김병준: 연출도 하시나?
윤학: 내 뜻을 잘 전달해 주는 연출자가 따로 있다. 처음에는 둘 사이에 갈등도 많았다.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이 잘 하고 있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서 되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김병준: 갤러리 구경도 잘 했다.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 많더라.
윤학: 아내를 생각했다. 인사동 근처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그림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적 감각이 좋고 글 솜씨도 좋다. 사실, 갤러리 하는 공간을 임대하면 수입은 열 배 이상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내가 인사동 그림을 보며 많은 것을 얻었듯이 누군가 이 갤러리를 통해 뭔가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김병준: 잡지와 마찬가지로 공연이나 갤러리 운영에도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좋은 내용을 담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윤학: 이걸 두고도 많은 분이 광고를 하라, 널리 알려라 한다. 하지만 그럴 시간과 힘이 있으면 내용을 더 다듬는다. 이러면 잘 될까, 저러면 잘 될까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편히 쉬고, 그러면서 순수한 감정들이 솟아나게 할까만 고민한다. 그러면 일이 더 잘 된다.
김병준: 거꾸로 사는 분을 만난 기분이다. 거꾸로? 그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바로'가 '거꾸로'가 되어 버렸다. 성공해 주셔서 고맙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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