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서럽구나, 우리네 삶은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 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이성복의 '정선' 전문)

1999년이었을 게다.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여 학교 도서관 서편으로 무너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책장 모서리에 불쑥 튀어나와 있었던 낡은 시집 한 권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라는 기묘한 이름을 지닌 그의 시집을 그렇게 처음으로 만났다. 문학이란 걸 한답시고 헐떡거리던 내가 20년이 지나서야 이 유명한 시집을 만난 건 무슨 인연이었을까. 그리고 3년 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불쑥 떠난 어느 여름날의 방황, 그 방황의 끝에서 만난 시집이 '남해 금산'이었다. 비로소 나는 이성복을 제법 알게 되었고 그가 대구에 살고 있다는 것, 지역 대학교의 교수라는 것도 알았다. 그해 여름 그의 연구실을 찾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계명대 성서 캠퍼스 배롱나무꽃에 흠뻑 취해 버린 기억도 있다. 그때 만난 시집이 '그 여름의 끝'이었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도 읽었다. 그해 새롭게 만난 '아, 입이 없는 것들'은 내 가방에 오래 담겨 있었던 최고의 시집이었다. 그러다가 그를 다시 잊었다. 삶이 바빴다.

그래도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는 법이다, 아무리 지나가려 해도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길이 있으니까. 2015년 모 신문사의 특집에 실린 그의 근황을 읽었고 교수직을 그만두고 팔공산 자락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경주란 지역, 신라라는 역사에 깊이 침잠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야 했다. '실크로드' 특강을 찾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드디어 그를 만나기 위해 팔공산 자락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인들을 통해 그가 살아가는 삶의 풍경을 탐색했다. 그런데 대구 문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성향이 독특하다는 표현도 나왔다. 쉽게 만나주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사람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지금 내가 지닌 그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결국 포기했다. 그러면서 그의 마지막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시집 제목이 특이했다. '래여애반다라'. 한동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시인의 말에는 '래(이곳에 와서)'여(같아지려 하다가)'애(슬픔을 맛보고)'반(맞서고 대들다가)'다(많은 일을 겪고)'라(비단처럼 펼쳐지다)'라고 해석해놓았다. 정말 그런가 하다가 문득 고등학교 문학수업이 떠올랐다.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향찰로 된 '풍요'의 두 번째 행이 바로 '래여애반다라'였다. 향찰로 읽으면 '오다, 서럽더라' 정도로 읽을 수 있을 텐데 이런 독법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신기했다.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성복은 자신의 시의 흐름을 '고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치욕(남해 금산)→사랑(그 여름의 끝)→일상(호랑가시나무의 추억)→불가능(아, 입이 없는 것들)→생사(래여애반다라)'로 설명했는데 시집 제목은 그런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긴 시간의 방황 끝에 돌아온 곳이 경주라는 역사의 근원이 되는 도시였고, 그 길은 삶에 대한 본질적인 탐색이었던 셈이다. '풍요'가 신라의 노래이면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노래, 나아가 노동을 하면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한 노동요라는 점에서도 충분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셈이다. 노동의 현장이 현실이라면 그 너머를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던가.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지만 내 몸 태워오고 건져 와야 하는 것이 시인의 바람이다. 죽음이 모든 시간의 끝이 아니라 다른 삶의 시작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승으로 간 자를 극진하게 예찬(禮讚)'추모(追慕)하고 제사(祭祀)를 지내고 극락왕생을 소원(所願)하는 것은 향가라는 장르가 지닌 마음이기도 하고 경주라는 도시가 품은 내면이기도 하다. 온통 '지금, 여기'의 욕망에만 매몰되어 꿈틀거리는 21세기 삶의 풍경에 대한 처절한 매질이라고 해석하면 화를 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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