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벅기념관에 가면,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네가 한 사람 있다.
노인네 나이에 비해 색상이 좀 야하다 싶은, 핫핑크색 재킷을 걸치고 손에는 부채를 쥐고 있다.
목걸이 명찰을 걸고 있는데, 명찰이 마치 태극무공훈장이라도 되는 양 뒷짐을 지고 다소 거만하게 서 있다.
그 노인네가 바로 나다. 문화해설사.
이 일은, 내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해온 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일이요, 긍지를 갖는 직함이다. 노년이 내게 준 깜짝 선물이요, 늘그막에 얻은 홍복이다.
하지만, 나는 펄벅에 대해서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는 것밖에 아는 게 없고, 그녀의 작품도 '대지' 외에는 읽은 게 없다. 또한, 그녀의 고국인 미국이나 그녀가 40년 동안이나 살아 고국이나 다름없다는 중국에도 가본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로, 문화하고는 거리가 먼 촌뜨기다.
이런 내가 펄벅기념관 문화해설사라니. 그렇긴 해도, 세상살이에 이리 채이고 저리 밟혀,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남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헐쭉해진 내 몰골이, 기념관이라는 어감이 풍기는 예스러운 이미지와 어울림 직하기는 하다.
6'25 때 놀라고, 보릿고개 때 배곯고, IMF 외환위기 때 데고, 주식에 투자하다 깡통 찬, 아픈 내력이 내 얼굴이나 몸, 어딘가에 화인처럼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야 나는 펄벅의 70여 작품을 찾아서 읽고, '대지 삼부작'보다 더 크고 두툼한 '펄벅평전'을 훑어보며 말깨나 하는, 유식한 문화인인 문화해설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부천 시니어클럽에서 관장하는 문화해설사의 선발기준은 '노인 일자리 만들어주기 사업'의 취지에 맞게 단순하고 아주 인간적이다. 면접이라는 요식을 치르긴 해도, 부천시에 적을 두고 있는 65세 이상 노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신체가 건강하면 더 말할 나위 없지만, 조금 부실해도 눈감아주니 다분히 친노적(親老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무(三無)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절대적 조건이다.
삼무란 첫째, 돈푼깨나 나가는 어연번듯한 집이 없어야 하고 둘째, 돈푼깨나 받는 그럴듯한 직장이 없어야 하고 셋째, 돈푼깨나 되는 보수를 받았으면 하는 돈 욕심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나도 삼무에 속한다. 주식에 투자하면서 돈푼깨나 나가는 대지 60평짜리 너른 집을 일찌감치 없애버렸고, IMF 때 그럴듯한 직장에서 쫓겨나 마누라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백수요, 책 욕심은 있어도 돈 욕심은-욕심낸다고 더 주는 것도 아니고-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없이 사는 노인네'라야 한다. 이걸 두고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하지만, '없이 사는 노인네'라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하거나 옹색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라고 했듯, 홀가분하게 삼무의 삶을 살다 보니, 저절로 삼락(三樂)을 얻게 되었다.
삼락이란, 문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 열면 마음에 맞는 손을 맞이하고, 문을 나서면 마음에 드는 산천경개를 찾아가는 세 가지 즐거움을 일컫는데, 조선조 유학자인 신흠(申欽) 선생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함이다.
펄벅기념관은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성주산 자락에 집필에 몰두한 작가처럼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소설 '대지'로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세계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요, 박애주의자이다.
여사는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태어난 혼혈고아들의 양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미국에 '웰컴 하우스'를 창설하고, 그녀도 일곱 명의 혼혈고아를 입양했다. 그 후, 혼혈아가 많은 아시아 여러 나라인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타이완, 그리고 한국에 '펄벅재단'을 설립해 혼혈아와 전쟁고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우리나라에는 1967년, 현 펄벅기념관 자리에 사재를 털어 '소사희망원'을 건립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냉대받고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전국의 많은 혼혈아와 전쟁고아들이, 이 시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시장 중앙에 높이 170㎝, 폭 45㎝ 크기의 산수화가 한 폭 있는데, 그녀가 80회 생신 때 소사희망원 예전 원생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산수화 뒷면에는 소사희망원을 거쳐 간 2천여 명의 원생 중 1천30명의 이름이 깨알같이 쓰여 있다. 그 명단에는 혼혈가수 인순이를 비롯하여 윤수일, 박일준, 함중아 등 유명 가수들 이름도 들어 있다.
올봄 유치원생들이 체험학습을 나온 날이었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노란 유니폼을 입고 나비 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를 것 같은 앙증맞은 나비들이었다. 활짝 핀 철쭉을 배경으로 깜찍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는 손에 손잡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로 전시장 안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초상화 속의 펄벅 여사가 활짝 웃으며 반기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자, 내 주위로 아이들이 나비 떼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유리진열장 안에 전시된 펄벅 여사의 유품인 머리핀을 가리키며 애써 부드럽게 얘기했다.
"이 자그마한 머리핀은 펄벅 할머니가 앞머리에 꽂고 다니셨던 머리핀인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머리는 왜 하얘요?"
아까부터 내 등에 기대고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 아이가 불쑥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섰다. 유치원 햇살반인 내 손녀 또래의 아이였다.
"그건 말이야, 왜냐하면…."
아이의 뜬금없는 행동과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마땅한 대답을 찾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머리가 허연 펄벅 여사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펄벅 할머니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 거란다."
"…우리 할아버지 머리는 까만데…."
"…." 나는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말대로라면, 그 아이 할아버지는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호연아, 그건, 호연이 할아버지는 머리를 까맣게 물을 들여서 그런 거란다."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