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중권의 새論새評] 그렇게 우리는 들쥐가 되었다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현 카이스트 겸직교수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현 카이스트 겸직교수

공천 주체가 되어야 할 정당 사라져

여당은 청와대, 야당은 객원군주가 주도

'나를 따르라'는 철학에 민주주의 압살

'그래도 찍어준다'는 믿음이 사태 키워

비록 '헬조선'이라 불려도 그나마 대한민국에 사는 자부심의 근거가 있다. 그래도 이 나라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시민의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옆 나라 일본만 해도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쟁취했다기보다는 사실 패전의 결과로 강요받은 것에 가깝다. 반면, 우리는 외려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항쟁을 통해 헌법 1조의 원리를 스스로 세웠다. 

옛날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이 "한국민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따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6·10항쟁으로 그의 발언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민주나 인권 면에서 아직 미국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미국보다 앞선 점도 있다. 가령 우리는 '오바마 케어'보다 앞서 건강보험을 도입했고, 미국보다 먼저 사형제도를 실질적으로 폐지했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의 상황은 이 자그마한 자부심을 무참히 깨버렸다. '민주정'의 주체여야 할 정치권이 외려 민주주의를 압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 모두에서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당 대표들의 권력은 무력화됐다. 김무성 대표는 앉은 자리에서 허수아비가 되었고, 문재인 대표는 아예 쫓겨나 야인이 되었다. 그들이 비운 자리는 이한구와 김종인이라는 선출되지 않은 객원군주로 채워졌다. 

그 결과 정당이 사라졌다. 공천의 주체는 당이어야 하나, 여당의 공천을 주도하는 것은 청와대다. 그러다 보니 공천의 원칙이 왜곡될 수밖에. 여당의 공천 기준은 이른바 '진실한 사람', 즉 '국민에게 봉사할 사람'이 아니라 '각하에게 봉사할 사람'이다. 그러니 입법부는 통법부로, 집권 여당은 청와대 출장소로 전락할 수밖에. 대통령의 손으로 뽑은 의원들이라면, 과거의 '유신정우회'와 대체 뭐가 다른가? 

야당은 어떤가?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표를 몰아내고도 수습할 능력이 안돼, 객원군주를 초빙해 신탁통치를 받고 있다. 한동안은 잘 되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정체성이 다른 이를 모셨으니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리 없다. 자기애가 유별나게 강한 군주께서 셀프 공천을 했다가 비판을 받고 삐쳐서 몽니를 부리자, 당 분위기가 신탁과 반탁이 부딪히는 해방전후사가 됐다.

이 사태에 원인을 제공했던 이들은 '새 정치'를 하겠다고 나갔다. 하지만 그 당의 대표 역시 선출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민주적 절차를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니, 그 당이라고 조용할 리 없다. 결국 주먹으로 사람을 치고, 상의 벗고 바닥에 드러눕는 눈꼴사나운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장면인가? 여기에도 '정당'은 없다. 그저 상이한 이해를 가진 계파들의 집합이 있을 뿐.

물론 비례대표 후보를 전 당원의 직접 투표로 선출한 정의당이나, 비례의원 임기순환제와 같은 참신한 실험을 하는 녹색당과 같은 예외는 있다. 사실 이 두 당이 특별히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정당의 기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정상이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상이 외려 예외에 속한다. 두 정당은 거대 정당들의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다.

사실상 집권 여당의 공천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이나, '차르'의 권능을 행사하는 제1야당의 객원군주나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고 있으나 실은 동일한 정치철학을 공유한다. '나를 따르라.' 이 두 분의 정치철학이 한국민을 졸지에 위컴이 말한 '들쥐'로 만들어 버렸다. 여당에서는 이견을 가진 이들은 철저히 솎아내고 있고, 야당의 객원군주 역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정치권이 저러면 사회라고 안전할 리 없다. 지금 정치권에서 보는 사태는 곧 사회 전체의 운영 원리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총선에서 누가 이기든, 또 얼마나 이기든, 이번 선거는 결국 국민의 패배가 될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우리 자신이다. 저들이 저럴 수 있는 것은 저래도 우리가 찍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찍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렵게 쟁취한 권리를 반납하고 스스로 들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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