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참여마당] 수필: 지지리 궁상이지만 가장 나답다

# 지지리 궁상이지만 가장 나답다

야간 당직을 마치고 아침 퇴근길에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향한다. 어느새 긴 겨울을 보내고 햇살 좋은 봄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 한 귀퉁이에 가방을 던져놓고 또 일을 만들어서 한다.

그냥 뒹굴뒹굴 쉬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또 궁상과 친구가 된다. 쌀벌레가 생기면 마트에 가서 쌀벌레 약을 구입해서 넣어두면 될 것을, 살림의 노하우라고 마늘을 열심히 까서 쌀통에 넣어둔다. 마늘을 넣어두면 쌀벌레가 없어진다고…. 그러고 보면 마트에 파는 약도 마늘 냄새가 풍긴다고 한다.

물먹는 하마를 여러 개 구입해서 장롱 안에 넣어두면 될 것을 남아도는 신문지를 찾아들고 이 방 저 방 다닌다. 신문지를 돌돌 말아 이불 속속들이, 옷 사이사이에 넣어둔다. 신문지도 습기를 제거하고 냄새를 흡수시킨다고.

물병 속의 물때를 솔로 팍팍 문지르고 세제로 씻으면 될 것을 굵은 소금과 약간의 물을 넣고 이리저리 흔든다. 굵은 소름이 녹으면서 물때도 없애고 살균 효과도 있다나.

다 뭉개진 빨랫비누를 빨간 양파망에 넣고 산산조각날 때까지 쓰고, 퐁퐁 한 통을 반쯤 덜어놓고 그 남은 반의 퐁퐁에 물을 섞어서 쓴다. 모든 걸 후다닥 마트 가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면 편하게 살 것을. 여기저기 살림을 보니 지지리 궁상이라고들 한다.

더러워진 운동화도 세탁소에 맡기고 옷도 드라이 맡기면 될 것을 소매를 걷어붙이고 솔로 운동화를 문지르고 옷도 거기에 맞는 세제를 풀어 손으로 쓱싹쓱싹 비비고 말리고 다림질을 후다닥한다. 단 몇 분을 투자하면 아낄 수 있는 걸 가지고 세탁소에 맡기자니 세탁소 주인장 좋은 일 하는 것 같아서 싫어진다. 남들은 편하게 살려고 힘들게라도 돈 버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힘들게 번 돈 너무 편해지자고 쓰긴 싫어진다.

내가 조금만 더 움직이고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면 저축하면서 알뜰살뜰 살 수 있는데. 미래의 남편이 이런 아내를 청승 떤다고 욕할까? 남편이 벌어다 주고 혹은 내가 벌어도 돈을 아껴서 쓰려고 하는 데서 오는 청승인지도 모르고.

언제인지 텔레비전 어느 드라마에서 한 대사가 생각난다. '너도 어른이지만 참 어른답다'라는 대사. 어른이지만 어른답다는 말, 아이지만 아이답다는 말이 가장 좋은 말이 아닐까 싶다.

지리리 궁상떨면서 살림의 지혜를 배우고 있지만 이게 가장 나다운 모습이다. 너무 그렇게 살아도 정떨어지고 궁색해진다고 뭐라고 하던데 진짜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오늘도 나는 지지리 궁상떨면서 청승 떨다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몇 자 적어본다. 그래도 가스레인지에 올려진 흰 빨래 삶는 소리가 정겹다. 보글보글. 나다움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소리 같다.

화창한 햇살 아래 깨끗이 씻어서 널어놓은 운동화가 참 예뻐 보인다. 이렇게 나의 쉬는 날은 끝나가고 있다. 지지리 궁상일지라도….

이가언(대구 달서구 이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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