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리와 울림] '정체성' 없는 권력정치가 문제다

연세대(독문과)·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철학박사) 졸업. 전 계명대 총장
연세대(독문과)·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철학박사) 졸업. 전 계명대 총장

다른 의견 한 번 개진했다고 내친다면

진정한 정당이 아니라 사적인 '파당'

지역이 배출한 정치인 편 가르기 강요

현명한 선택 통해 정치 정체성 만들어야

말이 춤을 추면 정치가 위태롭다는 증거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결정을 하는 정치에 참여하는 길은 말과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의 말과 행위를 지켜보면 된다. 어떤 사람의 인격은 말과 행위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즘 공천의 칼춤을 추는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 이한구의 말을 듣다 보면,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인격뿐만이 아니다. 정당의 정체성도 적나라하게 민낯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집권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이 공천 기준에 따라 소신대로 행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의 뜻에 따라 권력의 칼을 마구 휘두르는지 따질 필요도 없다. 그들이 궁지에 처하면 자꾸 들먹이는 국민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원칙도 기준도 절차도 없이 한 사람의 정치 생명을 끊어놓기 위해 온갖 말을 다 끌어대는 꼴이 삼류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개그 대사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중요한 말이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다. "당 정체성과 관련해 심하게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를 이끌고 갈 정치인의 공천 기준이라면 심히 우려된다.

이한구 위원장이 언급한 '정체성 정치'가 민주주의가 성숙한 서구사회에서 억압받는 소수집단의 언권을 보장하는 '아이덴티티 폴리틱스'(identity politics)를 말했을 리는 없다. 말투로 보아 이런 정치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정체성은 간단히 말해 최고 권력자의 말을 안 들으니 우리 편이 아니라는 단순한 정파성(政派性)에 불과하다. 국민의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정치'라면,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파벌적 통치일 뿐이다.

정치인으로서 품격도 없이 던진 말이긴 하지만, 이번 선거는 사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정체성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첫째, 정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싸움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권력 있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권위주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원칙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면 민주주의다. 물론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원칙도 없이 사람이 지배하면 독재이고, 사람이 지배하되 원칙을 갖고 하면 민주이다. 이렇게 간단한 게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의 정치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둘째, 정당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정책 정당'과 '정파 정당'의 싸움이다.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를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지금 진박과 비박으로 나뉘어 싸우는 새누리당을 보면 이 말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편은 자격 미달이라도 밀어주고, 반대편은 여지없이 찍어낸다. 슈미트의 말을 완전히 오해한 소치다. 슈미트가 말한 적은 '공적인 적'이다. 정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목표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고, 그것을 실현할 정책이 다를 수 있다. 다양한 정치적 이념과 정책의 경쟁에 의해 그 정당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법이다. 그런데 다른 의견 한 번 개진하였다고 내친다면, 그것은 '공적인 적'을 '사적인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로 돌아가는 정당은 진정한 정당이 아니다. 그것은 파당이다.

셋째, 진박과 비박의 투쟁은 '지역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싸움이다. 모두 지역이 배출한 '훌륭한' 정치인들인데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 이번 싸움이 현 정권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서 치러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구 사람들은 사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원칙을 선택할 것인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권위주의인가 아니면 밑으로부터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인가? 낡은 권력인가 아니면 새로운 정치인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현명한 선택을 통해 지역의 정치적 정체성을 합리적으로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정체성 없는 권력정치는 늘 문제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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