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포항 블루벨리 공사 현장…고향 못 버려 주저앉은 노인들

7,8가구 남았지만 정지작업, 비 내리면 흙 흘려내릴 수도…LH "새 주거지 최대한 지원"

블루밸리 내 폐허가 된 집들이 폭격을 맞은 듯 휑하다. 박승혁 기자
블루밸리 내 폐허가 된 집들이 폭격을 맞은 듯 휑하다. 박승혁 기자

흙먼지에 찌들어 털이 뭉쳐진 개 여럿 마리가 동네를 가로질러 달렸다. 주변으로 덤프트럭이 흙을 날랐고, 굴착기가 무심한 듯 집을 허물었다. 부서진 집은 폭격을 맞은 듯 휑했다.

23일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 막바지 부지 정지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쪽에 쌓아놓은 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힘겹게 서 있는 집 마루에 걸터앉은 할머니가 멍하니 굴착기 작업을 바라보고 있다. 비라도 내리면 흙덩이가 집을 덮칠 태세지만 할머니는 무덤덤하게 "갈 곳이 없는데 우째"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420여 가구가 보상금을 모두 받고 떠난 이곳에 남은 7, 8가구의 주민들은 그야말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김윤옥(62) 씨는 허리디스크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다. 남편은 신부전증으로 오랜 기간 투병 중이다. 세입자 신분이어서 이사 비용만으로 집을 비워줘야 한다. 집주인은 이미 보상금을 받고 모든 권리를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넘겼다. 황현순(가명'85) 할머니는 보상금은 받았지만 자식에게 모두 줬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돈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한다. 할머니는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집 마루를 하염없이 쓸었다.

이상민(66) 씨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왔다. 이사 갈 집을 구할 때까지 몸 누일 곳은 이곳뿐이다. 수발을 드는 아내는 병원문을 두드리고 싶은데 집 구하기도 여의치 않은 형편에 언감생심이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방법 외엔 없다.

정모시(85) 할머니는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집을 지키고 있다. 자식들이 어머니를 설득해도 할머니는 "살아봐야 얼마 산다고 이제 와서 고향을 버려"라며 단호하다. 편말선(82) 할머니는 보상금도 받지 않았다. 치매가 와 시내에 사는 아들이 매일 출근하며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할머니는 이웃을 만나고 동네를 거닐 때 증상이 가벼워져 이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남은 이들의 사연은 이처럼 안타깝지만 마땅히 하소연할 곳은 없다.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LH는 보상과 법적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이다. LH 측은 "명도소송 등을 진행할 수 있지만 주민들을 배려해 계속 기다려주고 있다.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사정이 어려운 분들을 배려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우리도 답답하다. 상황은 어렵지만 남은 주민들이 새로운 주거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