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국가가 열어줬다…『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존슨 너새니얼 펄트 지음/박광호 옮김/현실문화 펴냄

한국 현대사를 깡패의 역사로 바라본 책이다. 국가와 깡패가 유착했고, 정치권은 깡패를 활용했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국가가 아예 깡패의 관리자가 된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책의 배경이다. 저자는 외국인이다. 미국 출신인 '존슨 너새니얼 펄트' 일본 호세이대 방문강사다. 그는 1년간 직접 현직 검사 및 경찰관, 퇴직한 법무부장관, 서울'포항'전주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폭 두목들을 만나 취재해 이 책을 썼다.

깡패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전환점마다 등장했다. 광복 직후 혼란스럽던 한국에서 정당은 힘센 청년집단이 뒤에서 무력행사를 해 주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었다. 폭력과 협잡이 통하면 그게 곧 정의인 시대였고, 좌'우익은 서로를 꺾기 위해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우익이 점차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반공 의제를 강화하기 위해 우익을, 정확히는 우익불법무장세력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 때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와 '장군의 아들'로 잘 알려져 있는 김두한이 이끈 대한민청이 유명하다.

깡패는 부정선거에도 동원됐다. 비일비재했지만 1960년 대선 때가 절정이었다. 이들은 기표소에 가서 투표자들이 여당인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찍도록 강요했다. 또 야당인 민주당의 사무소를 박살 내고 민주당 선거 운동원들을 두들겨 패고 다녔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전체 투표수의 88.7%를 얻어 당선됐다. '3'15 부정선거'다. 그러자 시민들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4'19 혁명'이다. 이 시위를 막기 위해 역시 깡패가 동원됐지만, 성난 시민들을 꺾지는 못했다.

이후 한국 깡패는 어지럽게 흥망성쇠를 겪었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캠페인을 벌이며 깡패를 잡아들이고 조리돌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 정치 깡패의 원조 이정재를 사형시키는 등 이승만 정권 때부터 활동해 온 정치 깡패를 청산하며 이승만 정권에 책임을 묻고 현 정권의 정당성을 높이는 효과를 냈다. 다시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1980년대는 이제 '조폭'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깡패의 전성기였다. 지금도 조폭의 첫째가는 수입원인 유흥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 1981년 서울이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면서 건설, 재개발, 민간 경비 산업 붐이 일었고, 돈과 이권을 얻기 위한 조폭의 사업 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너무 잘 나가던 조폭은 다시 국가의 척결 대상이 됐다. 노태우 정권은 일명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규모 조폭 소탕 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어느 정권도 깡패를 혼은 냈지만 박멸하지는 않았다. 왜였을까. 저자는 "국가와 깡패는 협력과 긴장의 관계를 반복하며 공모한다"고 주장한다. 이 공모의 주도권은 늘 국가가 쥐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깡패를 관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국가와 비국가의 공모'는 실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국가가 형성될 때 그랬다.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은 필요에 따라 호족, 용병, 해적 등과 협력했다. 또 국가는 안보와 치안 유지를 위해서도 공모를 시도했다. 예를 들면 19세기 조선 조정은 행상들에게 밀정과 염탐 등의 일을 맡겼고 그 대가로 상권을 줬다. 이 같은 하청의 연결고리가 한국 현대사 속 국가와 깡패의 구도에도 이어진 셈이다.

깡패의 최신 명칭은 '용역 깡패'다. 돈만 주면 쇠 파이프를 들고 재개발 현장에 가서 강제 철거를 하고, 파업 분쇄 등을 통해 노동문제에도 개입한다. 용역은 유흥업에 이어 조폭의 두 번째 가는 수입원이다.

용역 깡패의 등장이 시사하는 점은 이렇다. 이전까지 깡패는 국가를 위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임무에 실패해 국가에 피해를 끼쳤다. 그런데 용역은 국가에 그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강제 철거는 국가의 업무가 아니다. 하지만 국가가 재개발 정책을 추진하려면 강제 철거는 반드시 진행돼야 하고, 그것을 민간 용역이 대신 해주니 국가는 좋다. 강제 철거 외에도 잡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정권의 이미지 훼손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다양한 강제력 행사를, 국가는 직접 하지 않고 합법적인 회사 형태를 갖춘 용역의 힘을 빌려 할 수 있게 됐다. 용역이 투입됐던 사건인 '용산 참사'나 '쌍용차 사태'를 평가할 때, 거슬러 올라가 국가에 일말의 책임이라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240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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