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이것이 백성이었던가-김훈의 '남한산성'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중략) "너는 어제 어가를 얼음 위로 인도하지 않았더냐?"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가히 말(語)들의 천국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출판되어 나오는 책만이 아니라 인터넷, TV 등의 미디어를 통해서도 말이 쏟아진다. 어떤 말은 결국 말이 되지 못하고 먼지처럼 떠돌기도 하고 연기처럼 산화하기도 한다. 말이 된 말도 다른 말에 의해 상처받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지기도 한다. 언제나 말은 존재했지만 '할 수 없는 말', '하지 못한 말'이 지금처럼 넘치는 시대는 만나지 못했다. 말은 개인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는 욕망하는 자다. 말의 과잉은 욕망의 과잉이고 말의 결핍은 욕망의 결핍이다. 지금의 말들은 과잉으로 흐르거나 결핍되어 있다. 과잉과 결핍은 21세기 '지금, 여기'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말 그대로 말의 세상이 펼쳐진다. 적에게 쫓겨 들어간 남한산성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도 말은 그치지 않는다. 이미 승부가 예정된 그 공간에서 말은 승리를 위한 도구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패배를 맞이할 것인가로 귀착된다. 어떤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자고 말한다. 물론 그들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적과는 화친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전쟁을 주장한다. 화친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실리를 추구한다. 전쟁에 이길 수 없다면, 뒷날을 준비하자는 발상이다. 두 주장은 언제나 평행선을 달린다. 공통점은 있다. 모두 국가만 있고, 그 안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35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리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소설가 김훈의 등장을 두고 누군가는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 개인에게도 김훈이라는 존재는 축복이었다. 특히 마음을 말이나 글로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한계에 늘 부끄러움을 느끼던 나는 빛나는 그의 문장에 자연스럽게 매료되었다. '자전거 여행'이나 '풍경과 상처' '칼의 노래'는 책 모두를 필사했다. 필사로 그치지 않고 내 이야기를 그 문장에 담아 낙서를 하기도 했다. 문장도 일종의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가 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김훈이 하는 말은 대부분 '밥'과 결부되어 있다. '밥'을 넘어서는 존재는 없었다. 우연히 찾아보았던 한겨레신문 기자 때 쓴 기사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시위대와 전경이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풍경. 그때부터 그는 '밥'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오랑캐에 의해 나라 전체가 유린당하고 임금은 남한산성에 갇혀 고통을 당하는 시간, 김훈은 그 시간을 '밥'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성 안의 사람도, 성 밖의 사람도 소위 '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절망을 절망으로 넘어서려는 김훈의 문장.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절망뿐이라는 것을 '칼의 노래'에서 읽었다. 나오면 오랑캐에 항복하는 것이고, 머물면 오랑캐에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남한산성'의 비극. 여전히 절망적이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희망을 김훈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서 찾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민족도 국가도 아닌 바로 '밥'이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사대부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송파나루의 뱃사공, 뱃사공의 딸 나루, 대장장이 서날쇠 등은 김훈의 빛나는 문장 속에서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그렇다. 어쩌면 진정한 희망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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