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나쁜 나무'의 부활

아카시나무는 1891년 처음 인천에 들어와 우리 땅에 뿌리내렸다. 그런데 100살 넘는 나이테를 가진 아카시나무의 시련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일제가 조선의 산을 망치기 위해 심었다. 뿌리가 산소의 관을 뚫고 무덤을 해친다. 다른 나무의 자람을 망친다.' 지금까지도 아카시나무는 '나쁜 나무'라는 굴레를 뒤집어쓴 나무로 굳어졌다.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 형편에 따라, 인간 삶이 그렇듯 아카시나무 역시 굴곡의 삶을 보내고 있다. 편견과 오해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간직한 나무인 셈이다.

원래 북미가 원산지인 아카시나무는 한 일본인이 중국 상하이에서 구한 묘목을 조선 땅에 심으면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다. 떠도는 소문의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문처럼 꼭 나쁜 나무만은 아닌 것은 분명한 듯하다. 나쁜 성질만 가졌다면 지금까지 온전히 살아남았을까? 길고 오랜 세월을 견디고 지금까지 버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인간에게 주는 이점이 나쁜 소문을 덮고도 남거나 컸기에 여태 산하에 버젓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유는 바로 여러 좋은 점이 있어서다. 아카시나무는 험하고 척박한 땅을 가리지 않고 잘 큰다. 개척수종(開拓樹種'pioneer species)이라 불리기도 하는 까닭이다. 관리를 별로 할 필요도 없다.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잘 자란다. 재질도 강해 쓰임새가 많다. 일제강점기 때 수탈과 맞물린 벌거숭이 산을 채우고 철도 침목, 땔감(연료)으로 더없이 좋았다. 1926~1940년에 9천400만 그루쯤 아카시 묘목을 키운 이유다. 당시 아카시나무는 그들 입맛대로 조선 산하를 뒤덮기에 더없이 좋은 나무였다. 물론 조선의 정기와 맥(脈)을 끊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카시나무의 가치는 뒷날에도 이어졌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쳐 1950~ 70년대는 민둥산 대책 나무였다. 헐벗은 산하로 인해 빚어지는 각종 재해를 막기 위한 사방과 치산, 땔감, 산림녹화 등 다목적에서다. 아카시나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홀대받아 심기조차 기피했다. 1990년대 들어서 IMF로 공공근로사업 때는 벌목대상 1호가 됐다. 1970년대 50만㏊에 이르렀던 아카시나무 조성 면적이 지금 5만㏊로 쪼그라든 것으로 알려졌다. 시대에 따라 아카시나무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렸고 아카시나무의 운명은 그야말로 내리막길이었다. 이런 즈음에 정부가 아카시나무 심기에 나섰다.

산을 푸르게 하고, 땔감을 주고, 목재로 쓰이고, 산사태를 막는 사방과 치산 효과 등 숱한 좋은 점에도 버림받던 아카시나무를 왜? 또 다른 용도에서다. 벌 즉 양봉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벌꿀 생산량은 23만8천t, 2천600억원에 이른다. 70% 이상이 아카시나무로 거둬들인다. 산림청이 2018년까지 국유림 450㏊에 아카시나무 심기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속내다. 아카시나무는 벌이 좋아하는 꽃꿀을 준다. 벌의 밀원 조성이 목적이다. 또 있다. 오래된 아카시나무의 온실가스 흡수 능력이다. 이는 지난해 경기도 광릉 숲에서 발견된 국내 최고인 100살의 아카시나무가 연간 이산화탄소 12.2㎏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증명됐다.

쓰임과 버림의 굴곡 속에서 '나쁜 나무'가 다시 부활할 기회를 맞은 듯하다. 100년 전 처음 우리 땅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아카시나무는 변함없지만 그 가치는 변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맞게 그 가치를 달리 보고 활용하려는 인간의 활동 덕분이다. 5월이면 대구경북 일부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아카시나무 꽃이 일찍 핀다. 아카시나무도 어느 곳보다 많다. 경북 칠곡군은 국내 유일하게 양봉특구로 지정돼 봉독치료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산림청의 아카시나무 심기 사업은 우리 자연 자원의 재발견과 활용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아카시나무로 다시 부활하는 대구경북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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