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위의 글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학창시절 한 번은 읽어 보았거나 최소한 제목은 들어 보았을 이상의 소설 '날개' 첫 부분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오래 폐병을 앓으면서 신경만 예민해 가던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세상에 펼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암호와 같은 기괴한 말로 언어적 유희를 즐긴다. 이 천재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될 때 '위트와 패러독스'를 포석처럼 늘어놓는다고 한다. 무슨 말을 굉장히 어렵게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 말은 요즘으로 치자면 다른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까지 '위트와 패러독스'(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포석처럼 늘어놓는 '아재 개그'를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박제가 된 천재는 '연애까지가 유쾌'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모습은 유곽에서 기생에게 얹혀사는 아주 '찌질한' 모습이다. 실제로 이상의 여러 소설에는 이런 비정상적인 연애의 모습이 나온다. 이상은 소설가 최정희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 적도 있지만, 최정희 작가는 선산 출신의 영화감독 김유영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김동환 시인과 재혼을 했으니 그냥 혼자 좌충우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할 것 없는 세상에서 연애의 실패는 그를 더 박제로 만들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올해 우리 반에는 매일 3교시에 등교하는 학생이 있다. 벌로 무슨 주제로든 원고지 20매 이상 쓰라고 했다. 학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써 놓고 갔는데,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었다. 요즘 학생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경험들이 있었고, 그 이야기들을 엮어 나가는 솜씨, 거침없고 솔직하며 재치 있는 표현 때문에 몰입을 해서 읽었다. 이 학생이 글을 쓰는 데는 밑바닥을 경험하면서도 많은 사색을 했던 것이 가장 큰 잠재력이고, 천재성도 한몫했다. 그렇지만 지금 입시 제도에서는 오로지 잠재력밖에 없는 이 학생을 받아 줄 국문과나 문예창작학과가 없다. 이상은 박제가 되어서라도 천재성을 후대에 남겼지만 요즘은 가난한 학생들의 천재성이 박제가 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