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병에 김치 또는 멸치조림, 양푼 도시락에 보리가 섞인 밥을 난로 위에 올려놓고 데워 먹던 시절이 있었다. 김칫국물이 쏟아져 책을 다 버리면 얼른 수돗가로 가서 책을 씻어내고 햇볕에 말렸다.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친구들과 함께 마주앉아 먹으면서 웃음을 짓곤 했다. 미처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하면 점심 무렵, 도시락을 들고 교실 주변을 기웃거리던 어머니들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내 눈이 마주치면 도시락을 창문 위로 높게 들고는 함박웃음을 짓던 어머니.
도시락을 통해 느꼈던 부모님의 사랑, 가족의 소중함을 찾아주려는 움직임이 대구에서 시작되고 있다.
◇대구시교육청, 부모와 자녀 간 소통의 고리로 '도시락' 활용
◆무너지는 가정과 청소년
최근 청소년의 자살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충동적 행동 양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많은 교육학자는 이 같은 원인으로 가정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가정불화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가족 간 소통 부재'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가정교육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부모의 어긋난 교육열로 사교육비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가정에서 이뤄져야 할 인성교육은 소홀히 취급되거나 심지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어린 초등학생 자녀라도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면 맞아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이 직장, 일에만 몰두한 탓에 아이들은 강제로 학원을 돌아다녀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원에 다니느라 오후 9,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귀가하는 학생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부모와 자녀는 대화는커녕 얼굴을 볼 시간조차 없다.
상황이 이렇자 대구시교육청은 부모와 자녀 소통의 돌파구로 다시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왜 도시락인가?' '도시락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란 질문을 갖게 된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가정에 따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아이들은 이 같은 부모의 사랑을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관심조차 없다고 여기는 학생도 있다.
교육청은 지난 2014년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자녀에게 전달할 방법의 하나로 '사랑의 도시락데이'를 시작했다.
도시락을 매개로 부모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고, 부모와 자녀 간 사랑의 고리를 이어주기 위해서다.
대구시교육청 관계자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일상에서 쉽게 감동을 할 수 있는 도시락, 손 편지가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했다"며 "도시락이 부모와 자녀가 튼튼한 사랑의 고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했다.
◆도시락, 가족을 세우다
사랑의 도시락데이는 도시락을 준비, 전달하는 전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가 더욱 친밀감을 형성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사랑의 도시락데이는 지난 2014년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중학교까지 확대됐다. 도시락데이를 실시할 날짜는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정하는데 일반적으로 학기별 1~3회 또는 월 1회 실시한다.
도시락데이에 앞서 학교는 전날 학생들에게 도시락을 준비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관찰하도록 사전 과제를 제시한다. 자신을 위해 도시락 반찬을 고민, 준비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사랑의 마음이 담긴 부모님의 진심을 느끼게 된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도시락을 꺼내면 그 안에는 부모님이 직접 쓴 손 편지가 들어 있다. 평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서로의 마음을 도시락데이를 계기로 확인하게 된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점심시간에 조를 이루도록 한 뒤 부모님이 도시락을 준비하는 모습을 본 소감을 자유롭게 나누도록 한다. 그리고 부모님께 한 줄 감사 메시지를 적어 도시락통에 붙이고서 이를 집으로 들고 간다.
자녀는 부모님이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을 준비하는 모습, 전날 장을 봐오는 모습에서 자신이 가정에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사람임을 느낀다. 사랑의 도시락데이가 단순히 도시락만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의 소통을 시작하는 첫 발걸음이 되는 셈이다.
학부모 배영진 씨는 "사랑의 도시락데이가 다가오면 도시락을 싸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내 아이가 어떤 반찬을 좋아할까?'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야 기뻐할까?'를 생각하게 된다"며 "도시락을 준비하는 부모 역시 매일 도시락을 싸주셨던 내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을 떠올려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된다"고 했다.
부모님이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과 사랑의 쪽지는 실제로 학생들에게 따뜻함과 감동을 전달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사랑의 도시락데이에 참여한 초등학생은 모두 1만1천698명. 이 가운데 86%는 '부모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먹고 부모님의 사랑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모두가 바쁜 현대사회에서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대화할 시간은 늘 부족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고 뒤돌아볼 여유가 없는 때일수록 아이들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가정이 중심을 잡아야 집 밖을 나선 자녀가 올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교육청 관계자는 "사랑의 도시락데이가 청소년 인성교육 함양과 가족 간 소통, 대화를 회복하는 데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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