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정권을 잡으려면 야당만 잘해서는 안 된다. 여당이 잘못해 줘야 한다. 야당이 잘해도 여당이 잘못해 주지 않으면 국민은 집권 세력을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함수관계는 야당이 전체 국민의 이익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 최악의 형태는 실정을 교정하려는 집권 세력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 생생한 실례가 1997년 외환위기 때 야당에 의한 금융개혁 법안의 무산이다.
이 법안은 당시 김영삼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가지 않기 위해 꺼낸 마지막 카드였다. 그 내용은 대통령 직속 금융개혁위원회가 신용 경색을 초래하는 막대한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신속히 처리하고, 정리해고와 파견근로를 쉽게 하는 개정 노동개혁 법안을 시행해 고용조정을 단행하며, 기업의 과잉중복투자를 조기에 해결한다는 것이다.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외국의 신뢰를 회복해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봤다. IMF의 대주주인 미국이 바라는 대로 한국의 경제 질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통과를 애걸했지만, 정치권은 들어주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가 앞장서고 자민련이 뒤를 따랐다. 여당인 신한국당도 마찬가지였다. 과반 의석을 갖고 있어 단독 처리가 가능했지만, 단독 처리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의식해 미온적 자세로 일관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 셈법에 있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각 당은 모든 사안을 대선에서의 유불리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박빙의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즉각적인 대량 해고와 도산을 의미하는 금융개혁법 통과에 앞장서는 것은 대선 포기나 마찬가지였다.
금융개혁 법안이 통과됐다면 IMF행을 막을 수 있었을까? 집권 후 DJ의 행보는 그랬을 것이란 추론을 가능케 한다. DJ는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속한 정책개혁에 나섰다. 그 내용은 자신이 무산시킨 금융개혁 법안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대선 과정에서 DJ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했지만, 그 준비는 YS 정부가 이미 해놓았던 것이다. 그 효과는 신속했다. 외국의 신뢰가 되살아나면서 한국은 1년 만에 외환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잘 먹히는 정책을 DJ는 집권 전에는 왜 반대했을까? 대선 책략이라는 것 말고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20대 국회에서도 이런 국민 배신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걱정이 든다. 정치 상황은 그때와 너무나 유사하다. 금융개혁 법안 통과를 거부한 1997년 국회와 20대 국회 모두 3당 균점 체제다.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 원내대표를 만나 'DJP식 협치'를 얘기했지만, DJP는 협치를 하기 전에 금융개혁 법안 무산에 야합했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구석은 별로 없다.
20대 국회는 어느 당도 단독으로 의사일정을 주도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리고 3당은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극과 극이다. 그 중간쯤에 있다는 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정강 정책은 좋은 말만 모아놓은 '잡탕'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치적 이득을 앞세운 3당 간 어지러운 합종연횡이나 사안별 나눠 먹기가 횡행할 것이란 예상이 더 현실적이다. 협치를 가장한 야합과 대중의 사랑받기 경쟁이 20대 국회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전조는 이미 드러나고 있다.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기업 구조조정은 절대 안 된다는 야당의 노동절 '성명'이 바로 그것이다. 구조조정은 해고를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모순 어법이다. 그리고 전체 국민에게는 다 같이 죽자는 얘기와 같다. 그 정치적 반대급부는 엄청나다. 어차피 모든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을 테니. 따라서 지금은 '성명'에 머물렀지만,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집요한 방해 공작이 펼쳐질 것이다. 20대 국회에 입성한 야당 인사들 상당수가 '운동'으로 단련된 '정치꾼'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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