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불교와의 동행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을 대해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걱정이 복받침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치고 누군들 분한을 품고 전하를 위하여 크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오도(吾道)가 장차 쇠퇴하려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이단(異端)이 날로 성하는 것을 우려하여 전하를 위하여 울면서 진달하는 것은 바로 전하께 충성하는 것이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왕조는 건국과 함께 삼국을 거쳐 고려를 이어온 불교를 배척했고 유생들도 그러했다. 갈수록 오로지 중국에서 들어온 유학 특히 주자 성리학만 최고로 여겼다. 유학의 다른 학파조차 이단시했다. 학문과 종교는 주자학 외길뿐이었다. 숨 막히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나라였고 사회였다. 명종 시절, 한때 폐기한 불교 선종과 교종을 재공인하려 하자 '유학은 쇠퇴하고 불교는 날로 성할 것을 우려'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조선실록(1550년 12월)에 흔적을 남겨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어떤 문집에는 "이제 우리 도는 끝이다. 인류는 장차 멸망하고 말 것"이란 극단적인 글도 있다.

조선은 불교처럼 스님 역시 천시했다. 숱한 문집에는 유람을 떠나거나 조용한 사찰을 찾은 유생이 스님을 하인 부리듯 궂은일 시키는 장면이 흔히 등장한다. 산사는 공부를 핑계 삼은 못된 사류(士類)의 휴식터 겸 놀이터 같았다. 성인군자가 되고자 하면서도 사람 차별은 철저했던 것이 조선의 그들이었다. 권세를 가진 사류는 많게는 수백 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목숨조차 멋대로 빼앗는 악행도 자행했다. 유학의 조선은 결국 그들의 걱정처럼 쇠퇴를 넘어 아예 나라와 함께 자취를 감춰야 할 운명을 맞았다. 외곬의 조선 유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19년 독립선언 33인에도 유학 대표는 없었다.

반면 천대와 핍박의 불교는 질곡의 조선 500년을 견디며 독립선언 33인에도 참여하는 등 민족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척의 유학과 달리 자비와 포용의 석가 가르침 덕분이다. 한민족의 끈기에 어울리는 한국 불교의 긴 생명력이다.

내일은 부처님오신날이다. 앞서 천주교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11일 오후 팔공총림 동화사를 찾아 주지 효광 스님과 만나 손을 맞잡았다. 종교 간 협력을 통한 환경 문제 공동 해결 노력도 다짐했다. 대구 두 종교 간의 부처님오신날과 12월 성탄절 교류는 여러 해 이어온 아름다운 동행이 됐다. 배척 없는, 포용과 관용의 동행이 영원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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