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은 늘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은 길을 가려면 용기마저 필요하다. 다소 낯선 전통문화인 '영제시조'(嶺制時調'경상도에서 부르는 시조창)의 맥을 잇는 김향교(52) 청구정가문화원 대표의 삶 또한 그러했다.
◆전통문화와의 인연
중'고교 시절 문학, 특히 우리 옛 문학 작품을 좋아했던 김 대표의 장래 희망은 국문학자였다. 자연스레 대학 전공 역시 국어국문학을 선택했다. 입학하자마자 '고전윤독회' '민속보존연구반' 등의 동아리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영제시조와의 인연은 그야말로 우연히 찾아왔다. 1996년 타계한 고(故) 이기릉 선생의 강연 알림을 보고 찾아간 게 평생의 업(業)으로 이어졌다. 성주 한개마을 출신인 이 선생은 1990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영제시조의 첫 예능보유자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칠 때의 일이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차에 재미 삼아 이 선생님 강연에 참석했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시조창(唱)을 가르치시는 분인지도 몰랐던 저는 시조 강좌인 줄 알고 갔거든요. 하하하."
영제시조의 매력에 빠져든 김 대표는 본격적으로 전수자의 길을 걸었다. 예쁜 목소리와 대학 동아리에서 익힌 장구 실력은 이 선생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김 대표는 1년여 만에 100여 곡을 모두 전수받고, 1989년부터 지도자로 나섰다.
1992년 영제시조 전수자로 지정받은 김 대표는 1994년 다시 음대에 입학했다. 올바른 계승을 위해서는 열정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이론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0년 아래인 국악과 후배들과 함께 가곡(歌曲)'가사(歌辭)'시창((詩唱) 공부에 매진한 끝에 박사학위 과정까지 마쳤다.
"석사 학위 논문을 들고 이 선생님의 산소로 달려간 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만족과 환희로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우리 겨레의 멋과 얼이 살아 숨 쉬는 시조가 사라져 가는 것을 가슴 아파하셨던 선생님은 제게 영제시조의 이론 체계를 세우라는 과제를 주셨거든요."
◆영제시조 저변 확대에 온 힘
영제시조는 사실 일반인에게 무척 생소한 분야다. 김 대표와 같은 대학원 전공자는 매우 드물고, 가르치는 곳도 거의 없다. 그가 저변 확대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대구경북지역 중'고교 및 대학 강단에서 영제시조를 가르쳐왔다. 교원연수원, 공무원교육원, 문화원, 청소년 전통문화 체험교실, 박물관, 평생교육원 등 그를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알리는 데 힘썼다. 스스로도 틈나는 대로 논어'맹자'주역을 배우는 등 고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적어도 수천 명은 가르친 것 같네요. 특히 2002년부터 10여 년간 진행한 육군3사관학교 강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수강 신청자가 5명뿐이었는데 나중에는 '오디션 보고 학생을 뽑자'는 말이 나올 만큼 인기 있었거든요. 김종서'이순신 같은 장군들이 남긴 시조를 노래하다 보면 구령 소리에 저절로 힘이 붙는답니다."
물론 영제시조 활성화를 목표로 공연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전문예술단체 '청구정가문화원' 대표로 있으면서 2012년부터 연간 6~10회가량 상설 공연을 마련해왔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과 서상돈 고택을 오가며 여는 연주회에서는 정가(正歌) 성악뿐 아니라 거문고 산조 등 기악 독주'합주, 전통무용을 즐길 수 있다. 이달에는 14일 오후 1시 경상감영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문화'예술의 도시인 대구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브랜드화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했습니다. 대구근대문화골목을 알리자는 뜻도 담겨 있고요. 쉽게 흥미를 이끌어내는 장르는 아니지만 다행히 반응은 좋습니다. 민요'판소리와 달리 정가는 앉아서 부르는데 흥이 날 때면 저도 모르게 일어서 노래하기도 합니다."
그는 20일 대구 '국악 풍류방 수오제'에서 영제시조 독창회를 앞두고 있다. 또 25일에는 경북대 개교 70주년 공연, 다음 달 5일에는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전에 참여한다.
◆한류 확산에도 이바지
1999년 영제시조 전수교육조교(후계자)로 지정받은 김 대표는 영제시조가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흥얼거리는 듯한 '느림의 미학'이 '빨리빨리 문화'의 병폐를 치유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시조창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인격 수양을 위해 즐긴 고급 음악 문화다.
"예술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인 면에만 치우쳐서는 안 되죠. 배우는 사람 스스로를 일깨우고, 함께하는 이웃에게 즐거움을 나눠줄 수 있어야죠."
그는 나아가 영제시조와 같은 시조창이 한류 확산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특히 같은 문화권인 동북아시아에서는 시조가 한자로 돼 있는 데다 내용도 공감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경상북도 관광홍보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일본'호주 공연을 다녀왔고, 오는 10월에는 대구문화재단 후원으로 한'중 교류음악회를 열 예정이다.
"외국에 나가 보니 한국 시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시협회(Poetry Foundation)가 시조 워크숍도 열고 있고요.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공연해달라는 부탁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한국적인 문화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외국어 학습을 꼭 강조하고 있어요."
◇경상도 전통 시조창…지방 풍토 닮아 씩씩하고 웅장한 느낌
◆영제시조란?
국악은 크게 정악과 민속악으로 나뉜다. 정악은 다시 나라의 공식 행사에서 쓰이던 궁중음악과 궁궐 밖 양반 계층에서 즐긴 풍류음악으로 갈라진다.
영제시조 등 시조에 일정한 선율과 장단을 붙여 부르는 노래인 시조창은 가곡'가사와 함께 정악에 속한다. 이 세 가지 노래를 정가(正歌)라고도 한다. 정악은 앉아서 노래하는 반면 민요'판소리 등 민속악은 서서 노래한다.
조선 후기에 시작된 시조창은 각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발달하여 왔다. 경상도의 영제(嶺制)를 비롯해 서울의 경제(京制), 전라도의 완제(完制), 충청도의 내포제(內浦制)가 있다. 최초의 악보는 정조 때인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 전한다.
영제는 경상도 지방의 말씨를 닮아 악센트가 강하고 씩씩하며 웅장한 느낌을 준다. 고종 때 영제시조의 3대 명창으로는 군위의 고영태, 경주의 이명서, 경남 의령의 손덕겸 선생이 꼽힌다.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예능보유자였던 이기릉 선생은 손덕겸을 사사한 친구 김영도에게 영제시조를 배워 전통을 이었다.
◆김향교 대표는?
1964년 청송군 부남면에서 태어났다. 대구 정화여고와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경북대 국악학과에서 석사'박사 과정을 마쳤다. 영제시조 전수교육조교(대구시 무형문화재 제6호), 가곡(대구시 무형문화재 제5호) 이수자로 한국국악협회 대구시지회 이사, 경북대 외래교수, 청구정가문화원 대표 등을 맡고 있다. 어릴 때부터 키가 커 고교 시절에는 무용가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선생님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국악 인생은 어찌 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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