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오피스 경제학/ 김윤지 지음/ 어크로스 펴냄
문화산업은 도박판 같다. 성공과 실패의 확률을 숫자로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도박판보다도 못하다. 역사가 오래된 도박의 세계에는 돈을 딸 확률을 그 나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도박사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이론으로 뒷받침하는 수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문화산업 판은 지금껏 제작자들의 감(感)과 운(運)으로 움직여졌고, 평론가들의 진부한 수사로 평가됐던 게 사실이다.
최근 들어 문화산업이 각광받고 있다. 아이돌 가요와 드라마 등의 분야에서 한류가 맹위를 떨치고 있고, 매년 관객 수 1천만 이상 영화도 여러 편 나오고 있다. 문화산업의 덩치가 급격히 커진 것이다. 여기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익이 나기도 하고 그만큼의 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산업처럼 성공의 이유와 실패의 까닭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장 큰 이유는 문화산업을 설명할 수 있는 데이터가 그동안 제대로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들도 문화산업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지금 문화산업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이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빈약하다.
이제 투자자들은 문화산업에 투자하기 전 제작자에게 투자를 유혹당하는 '썰'이 아닌, 합리적으로 투자하게 만들 '숫자와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문화산업의 소비자들 역시 이 영화가, 드라마가, 아이돌 그룹이 어떤 원리에 의해 대박을 쳤는지 아니면 쪽박을 찼는지 궁금해한다. 책은 바로 그 숫자와 데이터로 문화산업을 살펴본다.
2012년 대한민국 걸그룹을 대표하는 9인조 '소녀시대'의 세 멤버 태연, 티파니, 서현으로 구성된 유닛 그룹 '태티서'가 등장했다. 얼핏 보기에 소녀시대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뭘 해도 될 것 같은 팀이지만, 만들어질 때 철저한 빅데이터 분석을 거쳤다. 태연, 티파니, 서현이 마냥 서로 친해서 한팀이 된 것은 아니다. 소셜분석업체인 버즈인사이트가 텍스트 마이닝 기법을 활용해 '소녀시대'라는 검색 키워드로 각 멤버의 이미지, 재능, 퍼포먼스, 스타일 등을 분석했다. 이 같은 과학적 분석을 통해 저 3명의 조합이 흥행에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불황에는 어떤 영화가 뜬다'는 식의 뻔한 수사는 이제 상황을 좀 더 세밀하게 바라보고 수정해 쓸 필요가 있겠다. 가령 불황이라는 상황을 사회적 불안인 경우와 경제적 불황인 경우로 나눠서 말이다. 사회적 불안은 범죄와 테러 같은 물리적 안전에 대한 위협이 골자다. 이에 대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적 불황은 사람들의 물리적 안전을 직접 위협하지 않는데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 불안이 닥쳤을 때만큼 저항이 발생하지 않는다. 2000~2010년 독일, 영국, 스페인 개봉 영화 흥행 분석에 따르면 특정 장르 영화의 흥행이 도드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작사들이 심각한 내용의 영화를 더 많이 만드는 등 헛발질을 했다. "경제 불황에는 대중의 불안한 마음을 포착하는 진지한 영화가 성공한다"는 식의 미신 아닌 미신을 영화 기획에 참고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실제 수익이 발생하기도 전에 미리 돈으로 환산하는 '경제적 효과'라는 표현도 의심해 볼거리다. 추정 방식이 얼마나 정밀한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싸이의 세계적 히트곡 '강남스타일'이 1조원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낸 것으로 추정하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한때 나온 적이 있다. 과연 그럴까. 일단 강남스타일의 당시 총매출액은 330억원으로 집계됐다. 그렇다면 나머지 9천670억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언론에서는 '연관 산업 효과'와 '한국 홍보 효과'라고 했다. 한국은행의 산업연관표를 바탕으로 추정되는 경제적 효과는 어떤 제품이 제조업, 금융업, 유통업 등 다른 여러 산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경우 타당하게 산출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상품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강남스타일은 음원이다. MP3 다운로드와 음원 스트리밍이 급격히 늘어난다고 해서 한 번 만든 음원을 추가로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추가 비용은 꽤 미미한 수준이다. 따라서 연관 산업 효과를 계산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더구나 한국 홍보 효과는 계산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조차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하나 있다. 2001~2011년 우리나라가 92개국에 수출한 상품들을 분석했더니, 문화상품 수출이 100달러 늘어날 때 IT 제품, 의류, 화장품, 가공식품 수출액은 412달러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상품 수출이 다른 상품을 4배 수출시키는 '수출 견인 효과'는 있다고 봐도 되겠다. 311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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