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일 죽음-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가작

존재하는 만물은 변화하며 소멸한다는 진리에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세히 살피고 관철하여 보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죽음을 향하여 서로 누가 먼저 가나 경주하듯이 뜀박질로 뛰어가는 것 같다. 정점에 있는 사람이나, 빈부의 격차에 처한 사람이나, 또한 유'무식 차이점을 가지고 있어도, 태어난 이상 필멸의 명줄을 가진 인간이 처한 슬픈 숙명의 고리이다.

예순 중반까지 내 인생의 그림을 스스로 그리면서 힘겹게 넘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한 번쯤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나 벌써 십 년이나 지나도록 투병하고 있으니, 항상 죽음이라는 말을 괴춤에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그렇다고 무서워 벌벌 떨거나 죽음의 공포에 매달려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생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절제된 생활에 조금 힘들지만 규칙적인 운동이며 식음도 구별해 가린다. 그것은 오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건강하고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나의 신념이며 마지막 자존심이다. 병석에서 흐트러진 나의 피폐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죽음보다 더 슬픈 일이라 믿기 때문에 스스로 허락되지 않는다.

벌써 며칠째 정신이 혼미하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며 촉으로 느낀다. 검은 도포 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저승사자가 곧 찾아올 듯하다. 죽은 듯한 잠결 속에서 어머니가 나를 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육신에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이승에서의 한도 미련도 마음에 담겨 있는 모두가 밀려난다.

드디어 검은 복장의 사자가, 나의 혼백을 담아 갈 호리병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 따라나서라는 호통소리가 벽력과도 같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웅~ 웅' 하며 울린다. 손을 맞잡아 빌면서 딸아이 얼굴만이라도 한 번 보고 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해본다. 갈 길이 수만 리인데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고, 또다시 천지를 진동케 하는 우레와 같은 재촉이 또 떨어진다.

사자는 나의 혼백을 들고 있던 호리병 속으로 가둔다. 내 육신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면서 금생의 생을 마감한다. 나를 안고 있던 큰아이가 육신을 흔들고 불러 보지만 아무런 미동도 할 수 없다. 큰아이가 몸부림치며 목 놓아 운다. 뒤이어 숨 가쁘게 달려온 둘째도, 그렇게 애타게 보고 싶어했던 외동딸도 왔으나, 이미 육신에서 혼백이 떠난 뒤라 알아볼 수 없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통교가 막히며,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아졌다. 한 생명은 가고 부부간 부모 자식 간 등, 인연을 맺었던 슬픈 울음소리만 방안에 가득 차 처량할 뿐, 이승의 시간은 변함없이 흐른다.

혼백이 없는 육신은 굴러다니는 무생물과 진배없다. 그러나마 초상 준비를 한다고 야단이다. 살아생전 부모님께 자식 노릇 제대로 못 해 항상 마음이 아파서, 부모님 산소 근처에 분골로 뿌려지고 싶었다. 못난 자식 죽어서나마 부모님 곁을 지키려 한 나의 바람은 사라진다. 형제들은 선영 아래로 의견을 내고, 작은 아이는 호국원으로, 아내는 천주교 묘원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아내의 뜻으로 기운다.

낯익은 문상객들이 찾아 들어선다. 아이들이 모르는 생전의 지인들이다. 옛말에 정승의 말 죽음보다 본인의 상사에는 손님이 없다는 말이 틀림없다. 살아서 남의 길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으나 세태 인심은 그러하지 않은 모양새다.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믿음을 심었던 꼭 와야 할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몹시도 서운했으나 탓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날 나의 잘못된 허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세상 잘못 살다 간 내 혼백이 가련하고 외로울 뿐이다.

어렵고 까다로운 염습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제 아비의 시신을 소독물로 알뜰히 정결하게 닦는다. 그리고 저승에 입고 갈 죽음의 옷을 입힌다. 면대를 씌우고 신발을 신긴다. 일곱 가닥으로 육신을 동여매고 반 평도 안 되는 관으로 옮긴다. 관 뚜껑을 덮고 지난 이승에서 생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순간이다.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을까? 나 나름으로 바르게 살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일마다 허방을 짚고 가슴 아파하며 숱한 유혹에 끌려다녔다. 그 무게 값은 생전에 행하였던 망자의 몫이나 어디다 비교할 수 없이 깃털같이 가벼울 것 같다. 입관을 부여잡고 아이들이 울어 본들 사자가 들을 리 만무하다. 이 모든 것이 의식일지라도 이것마저 없으면 너무나 삭막하다 할 것이다.

마지막 밤의 시간이 소리 없이 괴괴하게 흘러간다. 밤을 잊은 아이들이 그래도 제 아비 죽음이라 훌쩍이며 울고 있다. 한 생명의 삶이 끝난 지금 울어 본들 무엇하며 울지 않는들 누가 탓할 일인가. 모든 것이 정지될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세월의 무상함이 아니더냐. 먼저 살다간 한 선인의 말과 같이 제행무상이다.

미련과 회한이 태산같이 많아도 떠나야 할 날, 먼동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다. 혼백 없는 육신을 보낼 채비를 한다. 형제자매들이 한잔 술로 이승과 저승의 영원한 이별의 정을 대신하고 있다. 부모에게 똑같이 뼈와 살을 같이 받은 동근 생으로 어찌 슬프고 슬프지 아니할까? 그러나 죽음이 가는 길을 함께할 수는 없다. 본시 한 뿌리에서 태어났으나 오는 길도 달랐으며 가는 길도 다르다. 또한 부부 금슬이 제아무리 좋다 한들 생사를 함께하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다.

큰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화마가 내 육신을 담은 관 위로 덮쳐오고 있다. 한 생명의 보잘것없는 금생 삶의 흔적을, 이 땅 어디에도 남을세라 영원히 말끔하게 지우고 있다. 불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흙으로 물로 화기로 바람으로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슨 연기로 사람의 삶으로 왔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더더구나 종국에 죽음은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알지 못하고 떠나는 길이다. 소멸의 섭리대로 죽음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짧은 이승의 삶이다. 천당과 극락이 있다고 한들 이승에서 죄 많고 모난 삶을 아등바등하게 살았으니 언감생심 생각지도 기웃거릴 일도 아니다. 이 또한 듣기만 하였지 가본 이 없으니 믿을 수도 아니 믿을 수도 없는 난감한 일이다.

살아 있는 삶 속에 희로애락이 있고, 참과 거짓을 나누어 사리를 분별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생활규범이라 여겨진다. 한 번뿐인 삶을 분별 있게 살아야 했으나 어리석게 지나쳐 온 가련한 인생길을 되짚어 본다. 남에게 칭찬받을 일은 모래 속 바늘 찾듯이 보이지 않고 오욕과 자괴감에 온몸이 떨리고 있다. 촌각마다 후회와 회한의 아픔이 물밀 듯이 밀려오지만 당장에 눈앞으로 닥칠 일만 생각해도 혼절할 지경이다. 어디서 어떻게 남은 일들이 마무리되며 끝이 날까? 칠흑 같은 앞날을 볼 수 없는 저승길이다.

아부지! 하는 큰아들의 부름에 천근만근 무게를 얹은, 동굴 속 같은 눈을 힘겹게 떴다. 깊은숨을 토해내고 희미한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다. 아마도 나는 며칠간이나 죽음의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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