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주의 시와함께] 사랑 시는 못 쓰고

김해자(1961~ )

사랑 시 한번 써보고 싶다 어둠속에서 사이좋은 땅콩 두알처럼 하나였을 때 꿈꾸며 서성이던 햇살 고운 아침, 전화가 왔다 내일까지 재직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대출연장이 취소됩니다

중략

무슨 그 정도 일을 가지고 우세요? 냉정하고 차분하고 교양있는 비아냥에 당장 갚겠다, 언제까지 갚으면 되느냐

중략

전화를 끊은 나는, 나도 나를 어쩔수 없어 내게 기도문을 외웠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식이 하나로 존재하는 나여, 만일 내가 내 피붙이가, 내 친구가, 내 조상이, …

중략

말단 대리와 싸우는 사이 막 솟아오르던 사랑시가 시들고 말았다

예술은 생활을 통해 수렴된다. 삶의 구체적 순간과 닿아 있지 못한 예술은 벼랑에 매달린 꽃처럼 아름답지만 그곳에 닿지 못하는 자들에겐 난공불락이다. 예술을 삶까지 끌어오는 인력이야말로 예술작품 속에 담긴 진지한 질문이다. 위대한 예술의 수심에는 삶을 관통하는 구체적인 순간들에 보내는 어떤 예의 같은 것이 어룽거리기 마련이다. 예술은 타전(打電)하는 일이다. 이 시처럼 문득 말문이 막히는 곳에 시가 있는 것은 생활의 다른 면이 아니라, 생활의 다른 이름이라고 우리가 부르던 것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여 나는 나랑 잘 지내고 있어요." 같은, 어떤 성인은 이별 후 수레에 한 무더기 책을 끌고 가서 강물에 버렸다고 하는데, 요즘 내 작문의 작의는 이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요즘 내 문장은 서로를 이별하기 위해 태어난 호흡들 같다. 시시해서 버려지는 시들처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