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품-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가작

삼우제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계셨다. 순간 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버지는 산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집안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저 세상에 간 그날까지 자신의 생활은 없었다. 오직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다.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한평생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바보처럼 살았다. 술 한 잔에도 벌벌 떨고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었다.

어린 날 황등장에 따라 갔을 때 점심을 거르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장을 돌면서 생필품을 이것저것 샀다. 점심때가 되자 시장기가 들었다. 좌판에서 파는 찐빵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빵 냄새는 콧대를 부러뜨렸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뱃속에서는 '꼬르륵꼬르륵' 개구리가 울고 있었다. 어린 나는 당연히 찐빵 몇 개쯤 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몰차게도 아버지는 찐빵 앞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었다. 나는 슬며시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버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만 보고 걸어갔다. 차마 찐빵을 사달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말해 봤자 지청구나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찐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찐빵 하나 안 주는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짠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아버지는 나의 반면교사였다. 나는 절대로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요구 사항을 다 들어줄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마루에 걸터앉은 나는 황등장에서 점심을 거르고 십리를 걸어왔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찐빵 하나를 안 사준 아버지는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을까? 찐빵 하나를 먹고 싶어 하는 자식을 앞세우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짠돌이 아버지였기에 육 남매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른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은 아버지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에 '공립 함열 보통학교' 2학년 중퇴인 아버지의 노력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늘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굶어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지론이자 좌우명이었다. 손에 쥔 것이 있어야 자식들 공부를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다. 막걸리 한 대접을 참고 황등장에서 찐빵 하나를 아낀 것들이 모여 아버지의 재산이 되었다.

아내와 동생 내외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쓰던 앉은뱅이 책상이 밖으로 나오고 장롱이 따라나왔다. 책상 서랍에서 헌 손목시계가 나왔다. 아버지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머리빗이 나왔다. 빗에 낀 머리카락에서 아버지 냄새가 났다. 알 수 없는 장부도 나왔다. 둘째가 장부를 펴 넘기면서 별의별 것이 다 적혀 있다고 한다. 몇 년도에 쌀값이 얼마이고 자식들의 월사금으로 얼마가 나갔고 할아버지 제사상 차림에 뭣뭣을 샀고 총 경비는 얼마가 들었다고 쓴 삐뚤삐뚤하고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하다. 금방이라도 장부 밖으로 기어 나올 것 같았다.

아내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안방 벽장에 있었다고 한다. 상자 뚜껑을 열자 문서들이 쏟아졌다. 집문서, 논문서, 밭문서, 저금통장이었다. 문서들 속에서 귀퉁이가 닳고 닳은 봉투 하나가 보였다. 봉투를 여는 순간 나는 그만 목이 메고 말았다. 그것은 내 초등학교 통신표였다. 중요한 문서도 아니고 돈이 될 만한 것도 아닌 것을 수십 년 동안이나 보관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봉투의 모서리가 닳고 때가 묻은 것을 보니 그것은 여러 차례 봉투 속의 통신표를 꺼내 봤다는 증거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신표를 폈다. 교과학습발달상황 도구 교과인 국어, 산수, 사회, 자연 그리고 예체능 교과인 음악, 미술, 체육 그 아래 행동발달사항 가, 나, 다에는 붓두껍으로 찍은 인주 색깔이 아직도 선명하였다. 당시의 학업성취도 평가는 수, 우, 미, 양, 가(秀, 優, 優, 良, 可)로 표기했다. 절대 평가인 수, 우, 미, 양, 가는 '100점~90점이면 수, 89점~80점이면 우, 79점~70이면 미, 69점~60점 양, 59점~0점이면 가'다. 학생들은 수를 받으면 말 그대로 기분이 좋았다. 우나 미는 보통으로 그럭저럭이라고 자위를 했다. 그러나 양, 가에는 울상을 짓기도 했다. 양, 가를 맞으면 보나 마나 부모님께 혼찌검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교과학습발달사항의 내 성적은 양, 가로 도배를 했다. 내가 보기에도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통신표 어디에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내 통신표를 보며 얼마나 화가 났을까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통신표 아래 여백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들아 양(良), 가(可)라고 걱정하지 마라. 기죽을 필요 없다." 나는 아버지가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는 통신표를 접어서 슬며시 뒷주머니에 우겨넣었다.

십수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백과사전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수, 우, 미, 양, 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수(秀)는 '빼어날 수'이고 우(優)는 '우량하다'. 미(美)는 '아름답다', 양(良)은 '훌륭하다', 가(可)는 '옳다'라는 뜻이었다. 어느 한 글자 나쁜 뜻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수(秀)만 좋아하고 양(良), 가(可)는 그토록 싫어했을까? 글을 읽는 순간 나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버지가 통신표 아래에 쓴 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들아! 너는 훌륭하다. 네가 옳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질책이 아니라 격려였다. 아버지는 지식은 일천했지만 지혜의 깊이는 바다보다도 더 깊었다. 그때 내가 만약 아버지이었더라면 "이놈아 밥값이나 해라. 양(良), 가(可)가 뭐냐? 이것도 통신표라고 들고 왔느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나라는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다 같은 아버지다. 그러나 나라는 아버지의 무늬와 우리 아버지의 무늬는 하늘과 땅 차이다. 화만 내는 아버지의 가슴에는 불이 들어 있지만 격려하는 아버지의 가슴에는 물이 들어 있다. 지금은 성적이 형편없지만 언젠가는 잘할 것이라는 아버지의 믿음이 유품으로 남아 자식 교육의 한 수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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