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의 차량을 빌려 타고 갈 때였다. 바로 앞에서 운행 중인 차량이 우측 방향지시등을 켜더니 한참 차로 변경을 못 한 채 거북이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속이 터진 지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저 X의 김여사"라고 내뱉었고 나 또한 '어휴'라며 동조했다. 하지만 얼마 뒤 그 차량의 운전자는 40대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운전자가 아줌마라고 확신했던 지인과 나는 '어'라는 말로 머쓱함을 대신했다.
우리 사회는 최근 '혐오'(嫌惡)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그 불쏘시개는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피의자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됐다. 경찰은 살인 동기를 '조현병(調絃病)으로 인한 피해망상'으로 결론 내렸지만 여성 혐오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혐오 현상을 보고 듣고 경험한다. 앞에 이야기한 사례도 '김여사'에 대한 혐오를 보여주는 해프닝이다.
아이들만 보더라도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부모의 직업이 뭐인지 등에 따라 편 가르기와 보이지 않는 혐오에 노출돼 있다. 아는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일부 학부모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나 부모가 맞벌이하는 집 아이와는 같이 놀지 말라고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며 "어릴 때부터 자신의 조건에 맞춰 친구를 고르도록 가르치는 부모의 모습이 씁쓸했다"고 말했다. 다문화가정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는 '제노포비아'로 대변된다.
특히 여성에 대한 혐오는 인터넷상에서 각종 용어가 확대 재생산될 만큼 표면화되고 있다. '김치녀', '된장녀', '성괴' 등으로 대표되는 여성 비하 신조어는 최근 들어 '맘충'과 같은 벌레에 비유하는 용어로까지 변질됐다. 이에 맞서 여성들도 '한남충' 등이라는 용어로 남성 혐오를 표현하는 등 인터넷에서는 혐오가 남녀 대결 구도로까지 번지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남녀 간 성평등 가치 갈등 양상의 현황 등을 살펴보기 위해 지난해 10월 1∼20일 15세 이상 35세 미만 남성 1천200명과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여성 비하 표현에 대해 응답 남성의 54%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연령대로 보면 응답한 남성 청소년의 66.7%가 공감한다는 답을 내놓아 어린 연령대에서 여성 혐오가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혐오의 밑바탕에는 우리 내면에 첩첩이 쌓인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여성이나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는 심리학적으로 '투사'의 일종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투사는 자신의 분노와 열등감, 공격성 등의 감정을 특정인에게 돌리는 방어기제의 하나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노오력'이라는 신조어가 뜬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답이 없는 상태로 개인의 자질과 태도로 몰아가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취업대란, 청년명퇴, 저출산과 고령화, 치솟는 주거비와 자살률, 부의 양극화, 취약한 사회안전망…. 최근 젊은 층은 이런 우리 사회의 민낯에 맞닥뜨려 있다. 이른바 '노오력'으로 안 되는 것투성이인 사회에서 그들은 좌절과 분노를 겪는다. '헬조선', '노답사회'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용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희생양을 찾아 그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고 혐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약자가 자신을 억압하는 강자에게 분노를 표출해야 하지만 사회 양극화 등으로 '만만한' 약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슬픈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혐오는 사회 구조적인 병폐가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괴물'이다. 이 때문에 이를 법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은 '교육'이다. 서로 간의 차이가 차별되고 혐오로 변질되지 않도록 교육이 보여줘야 한다. 최근 불거진 '혐오' 논란은 교육 현장에 차이가 관용과 화합으로 섞일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강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