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륙 횡단 열차는 여행자들에게 꿈의 코스 중 하나다. 아쉽게도 필자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훗날을 기약하면서 그래도 그 맛을 조금이라도 음미하고자 하바로프스크에서 2박을 한 후 기차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기차서 1박, 블라디보스토크서 2박을 한 후 러시아 항공기로 김해공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았다. 현재 러시아는 유가 하락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이 심한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환율이 거의 반 토막 나다시피 했고 최근 조금 회복하긴 했지만 여전히 바닥 수준이다. 여행객들에게는 매우 좋은 소식이지만 현지인들은 일거리가 없어 이혼율마저 더 높아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한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국적기는 북한 영공을 통과할 수 없기에 중국 상공을 거쳐 약 1시간 정도 더 허비하여 하바로프스크 공항에 도착하였다. 하바로프스크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중심이자 최대 도시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항일운동과 한인 사회주의자, 그리고 고려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바로프스크 기차역을 중심으로 전면에 확 트인 일직선으로 도로와 공원이 있다. 그 양쪽에 오래된 트림(지상전철)이 마치 구시대를 연상하듯 미끄러져 다닌다. 근데 트림 운전사는 모두 여성들이다. 그 이유는 트림은 운전하기가 쉽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만 주어진 직업이라 한다. 여성을 배려하는 정책이 세심하게 숨어 있는 한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끝 지점 좌측에 큰 전통시장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시장과 비슷했으며 온갖 토속품과 계절에 수확한 농산물들과 꽃이 가득하다. 김치를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주인은 고려인인데 한국말은 못했다. 김치 한 봉지를 산 나에게 백김치 한 봉지를 덤으로 준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가슴 한구석에 짠한 것이 밀려온다. 연신 "스파시바"(감사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인 아파트로 향했다. 동토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인지 출입문은 2중으로 되어 있다.
다음 날 아침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이슬비가 살포시 내린다. 5월인데도 불구하고 두꺼운 옷을 걸치지 않으면 다니기가 힘들다. 도심을 한쪽만 끼고 흐르는 아무르강은 산책길과 공원 등 시민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한다. 이 강을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 부르는데, 강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나눈다. 강가에 2001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한 기념비가 있다. 유람선을 탔다. 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로 볼거리는 별로 없지만 왠지 한 번 정도는 이용해야만 할 것 같은 여행자의 의무감처럼 한 바퀴를 돌았다. 오전이 후딱 지나 점심도 먹고 몸도 녹일 겸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샤슬릭(꼬치구이)과 독한 보드카 몇 잔에 몸이 누그러진다. 마무리는 홀레브(흑빵)와 보르쉬(붉은색의 수프)로 하고 찐한 커피로 입가심했다. 오후에 찾은 향토박물관은 하바로프스크의 자연, 역사, 경제, 생활 등에 관한 자료 15만여 점을 전시한 장소로 붉은 벽돌로 고풍스럽게 지어져 있다. 약 7천원 남짓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입구 안에 덩치가 큰 중년 여성 직원이 무표정하게 티켓을 확인한다. 엄청난 크기의 매머드뼈와 고래뼈가 전시되어 있고 각종 동물들의 박제가 많이 있다. 다른 관에는 과거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을 배경으로 신혼부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5월의 신부는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신다. 영원의 불과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는 꼼소몰 광장으로 향했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이 있고 그 주위에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30m 높이의 대형 기념비와 반원형의 대리석 추모비가 광장 중앙에 있다. 추모비 한가운데는 당시 사망한 3만2천662명의 극동군 명부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왠지 모를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걸어서 10여 분 남짓 떨어져 있는 프리오브라젠스크 성당으로 갔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며 둥근 돔형지붕은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벽면은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굉장히 세련되어 보인다.
2박 3일간의 짧은 여정을 뒤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하바로프스크 기차역으로 갔다. 저녁에 출발하여 다음 날 오전에 도착하는 기차로 쿠페라는 가장 좋은 등급인 4인용 침대칸을 5만원 정도의 금액으로 끊었다. 기차 이용 시 시간을 잘 체크해야 하는데 출발과 도착 시간 모두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차를 기다리던 중 김일성 배지를 단 한 무리의 북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관광객 같지는 않고 아마 노무자들인 듯 보였다. 그중에는 제법 세련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들도 보인다. 평소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중년의 여성들에게 다가가 반갑다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을 건넸다. 여성들은 아무런 대꾸없이 그저 웃기만 한다. 그때 리더인 듯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무슨 일도 없는데 사진은 뭐 하러 찍습네까"하면서 제재를 한다. 갑자기 무안해지고 말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러워 돌아섰다.
보드카와 약간의 음식을 준비해서 기차에 올랐다. 칸마다 승무원이 있으며 식용으로 24시간 뜨거운 물이 나오는 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출발과 동시에 침대와 베개 시트를 나누어 준다. 시트를 씌우고 나니 침대의 푹신함과 깔끔함이 호텔방 부럽지 않다. 편안히 누워서 느끼는 기차의 덜컹거리는 흔들림은 엄마의 자장가처럼 느껴진다. 때마침 시작한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흐르는 침대칸에서 마주앉은 러시아인들과 함께 부딪친 보드카 잔은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