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서쪽,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를 접하고 있는 지역을 티롤이라고 부릅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티롤주는 이탈리아의 북부 돌로미테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는데 전쟁에 패하면서 그 지역은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습니다. 티롤 사람들은 자부심도 대단하여 아직도 북부 이탈리아를 남 티롤이라 부르고 자기네 지역을 '알프스의 장미'라고 이름 지어 부릅니다.
티롤주는 알프스에 속한 지역답게 만년설과 산림, 목초지가 조화를 이룬 관광의 명소입니다. 스키장만 24개이고 동계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했던 겨울 스포츠의 메카이기도 합니다. 인구는 70만 명에 불과하지만 사시사철 관광객과 휴가 인파로 인해 한적할 날이 없습니다. 고산준봉들도 많아 산악인들에게도 아주 인기가 많은 곳입니다. 또 그만큼 산악사고가 잦은 곳이기도 하지요. 어느 해인가 티롤 지방에서 1월부터 6월 사이 산악사고로 희생된 사람이 100명을 넘어섰다는 통계 기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장미 가지에 가시가 달린 것처럼 알프스의 아름다움 뒤에도 항상 위험은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저도 가끔 동료와 함께 티롤 지역 산을 오르곤 했는데, 만년설을 처음 오르던 날 동행했던 교포의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신부님 여기 티롤에서 산길을 걸을 때는 꼭 지키셔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걸을 때는 길과 발아래를 확인하시고, 경치를 감상하시려거든 반드시 걸음을 멈추어 서서 보셔야 합니다." 산길이 위험하니 주위를 둘러보려면 안전을 위해서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주의사항이었지만, 걸음을 멈추면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습니다. '걸음을 멈추어서 보라'는 그분의 조언은 산을 좋아하는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저의 삶의 든든한 길잡이로도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조금씩 아껴 읽는 책 속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들떴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키고 나니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줄이자 평소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걸고 나서 평일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 평소 병통이 많았던 줄을 알았다. 정을 쏟은 후에야 평상시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다." -명나라 진계유(陳繼愈: 1558~1639)의 안득장자언(安得長者言)의 한 대목-
한 구절 한 구절이 참으로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합니다. 달리던 것을 멈추면 주변도 보이고 이웃도 보입니다. 그리고 나도 보입니다. 지금 인용한 진계유의 글은 작가 자신을 제대로 본 자성의 글이겠지요.
그런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은 걸음을 멈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더 여유롭고 더 편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해서 사람이 편한 게 아니라, 일자리가 줄어듭니다. 누군가는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동료와 경쟁해야 하고, 밀려난 사람은 다른 일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도 했지만, 사람을 소외시키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심도 각박해졌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멈추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차라리 비슷한 처지의 동료와 갖는 술자리가 훨씬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멈추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멈춤이 필요합니다. 멈추어 서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제대로 가고는 있었는지 점검해 본다면 이 멈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글을 적는 와중에도 제 가슴 한구석이 뜨끔합니다. 제가 봉사하고 있는 이 교회가 잠시라도 쉬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는가 하고 누군가가 질문해 온다면? 저에게도 멈춤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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