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정두언 전 국회의원·방송인

SD 공천에 "그런 게 어디 있나" 반대…사리 안 맞으면 못 참아

사진=이성근 객원기자
사진=이성근 객원기자

정치인 정두언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과 늘 겨루어왔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상대가 누구든 아프게 찌르는 게 그의 특기다. 듣는 사람은 통쾌하지만 화를 부르기도 했다. 억울한 옥살이가 대표적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양심'이라 칭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너무 튄다'고 얘기한다.

'흙수저' 출신으로서 경기고, 서울대를 나왔고 대학 때 고시를 통과했다. 정무장관실, 총리실에서 잘나가는 공무원 생활을 했고 2000년 국회의원에 도전했다가 낙마했다. 그 뒤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이명박(MB) 정권 개국공신이 됐다. 국회의원만 3번을 했다. 올해 총선에서 다시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낙선 후 그는 방송 진행자로 변신했다. 보컬 리더, 탤런트 지망생, 가수 등 과거의 이력을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달려가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한 장막이 열린 것이다.

6월 초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자신의 이야기이든, 전'현직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이든 역시 거침이 없었다. '정두언'다운 모습이었다.

김병준: 지난 20대 총선에서 낙선하셨다. 어떤 기분인지 좀 들어보자.

정두언: 담담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들 실제로 안 그런데 그런 척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담담하다. 오히려 지지자를 포함한 주변분들이 힘들어한다. 그게 걱정이다.

김병준: 그러기 힘든데, 혹시 국회의원 말고 다른 할 일이 있어서 그런가?

정두언: 굳이 말하자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최근 몇 년간 세상의 밑바닥까지 가 봤다. 억울한 옥살이까지 하지 않았나. 그래서 웬만한 일은 다 받아들인다. 다들 밀리는 게 겁나고, 외로운 게 겁이 나서 전전긍긍하는데 나는 이 점에서 내성이 좀 생겼다.

김병준: 또 다른 이유는?

정두언: 우스갯소리 하나 하자. 서울 시내에서 사주나 점을 보는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이 내 지역구인 서대문이다. 이분, 저분이 수시로 내 미래를 봐 주는데 하나같이 4월 13일, 즉 선거일을 길일이라 했다. 알 수 있나, 이게 진짜 길일인지. 말하자면 더 잘되려고 떨어진 건지.(웃음) 사실 그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김병준: 언제 말인가?

정두언: 2000년 총선 때 공무원 하다 후다닥 쫓아나와 출마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퇴직금만 다 날렸다. 그런데 몇 년 후 서울시 부시장이 되더라. 그게 인연이 되어 당시 시장으로 모셨던 MB의 측근이 되어 한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사람 일 모른다.(웃음)

김병준: 하기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도 있지 않나.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새 일을 시작했더라.

정두언: 낙선한 김에 하고 싶은 일 좀 했으면 했는데, 바로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TV조선 에서 김유정 전 의원과 함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90분간 생방송을 진행한다. 방송 초보자에게는 과분한 일이다. 자료 보고 회의하고 메시지 준비하고…. 바쁘다.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는 일이다.

김병준: 전문성과 경험이 있으시다. 게다가 '끼'도 있다. 잘할 것 같다. 이 길로 가는 것 아닌가?

정두언: 공무원으로 20년, 정치인으로 15년, 그리고 이제 방송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잘해서 인생 3모작으로 가고, 그래서 송해 선생 후계자라도 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웃음)

김병준: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웃음) 송해 선생같이 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로망이다.

정두언: 윤형주 선생도 있다. 70세나 된 분이 청바지 입고 기타 치며 노래하고 강의한다. 사람들에게 메시지와 감동을 준다. 가끔씩 이렇게 생각한다. 이분이 평탄하게만 살았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청년 시절 최정상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감옥에 가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다진 결과 아니겠나? 뭐든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낙선한 것, 그래서 더욱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김병준: 원래 정치를 하고 싶었나?

정두언: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내 말이 결혼하기 전부터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한다.

김병준: 일종의 잠재된 꿈이었나 보다.

정두언: 어린 시절 친척 어른 집에 더부살이를 했다. 나는 큰아버지라 불렀고, 아버지가 운전기사를 했는데 그가 바로 제7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성태 의원이다. 어린 나에게 큰아버지는 우상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잘생기고 청렴하고…. 큰아버지에 대한 그런 기억이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만든 게 아니었을까?

* 편집자 주: 정성태 의원은 3대부터 8대까지 6선 국회의원으로서 제7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64년 한일협정 비준에 항의하며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3선 개헌을 반대하며 광주에서 서울까지 침묵 도보시위를 하는 등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연장에 강력히 저항하기도 했다. 김대중이라는 새로운 리더가 나타나기 전까지 호남정치의 중심인물이었다.

김병준: 정치인이기 전에 노래와 연기 등에 대한 꿈도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음반 취입도 했고.

정두언: 노래는 고등학교 때 그룹 활동을 하면서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록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음반 취입은 서울시 부시장 때의 일이다. 평소 "우리는 왜 모든 행사를 그냥 밋밋하게 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면서 내 퇴임식은 좀 다르게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예컨대 내가 노래를 한 곡 멋있게 부르고…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다시 노래를 하게 되었다.

김병준: 그게 음반 취입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인가?

정두언: 노래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누가 음반을 만들어 시장에 내보내자고 했다. 그래서 잘될 수 있나 보다 하고 4집까지 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속은 것 같다.(웃음) 정치인이 노래를 하면 누가 노래로 듣겠나. 홍보용 이벤트를 한다고 생각하지. 흥행에는 실패했다.

김병준: 그래도 에도 나가고 까지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두언: 그뿐만 아니라 공연도 여러 번 했다. 지금도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 하고 싶다. 얼마 전에도 에 나가려고 했다. 노래까지 준비했는데, 선거법상 할 수 있는 시한을 넘겨 못 나갔다. 대신 이걸 선거 로고송으로 썼다. 당연히 직접 불렀다.

김병준: TV 탤런트를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더라.

정두언: 1987년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우선 공무원 생활이 잘 맞지 않았다. 규칙과 규격에 맞추어야 하고, 천편일률적이고…. 때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아프리카 용병으로 지원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김병준: 빨간테 안경에 멜빵 바지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답답했다는 말 아니겠나.

정두언: 더 중요한 건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세상에 미안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하다 군대 끌려갈 때 나는 고시공부를 했고, 권위주의로 모든 국민이 숨 막혀 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공무원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공무원 생활이 더 답답해졌다.

김병준: 그래서 때려치우고 탤런트가 되려고 했다?

정두언: 그 이전에 공무원을 '멋있게'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합청사 옥상에 올라가서 권위주의 독재정권 연장을 반대하는 현수막을 내려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결국 동조자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겠나. 그냥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수밖에.

김병준: 그래서 어디까지 갔나?

정두언: TV 탤런트 공개모집에 응모했다. 이것저것 다 통과했지만 최종면접에 가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친구와 이 문제를 상의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가 배신을 해 이를 아내에게 일러바쳤다. 결국 가족들에게 '억류'되어 최종면접을 못 간 거다.

김병준: 지금도 하고 싶을 것 같다.

정두언: 하고 싶다. 악역을 멋있게 해 봤으면 좋겠다. 악역이 잘 어울릴 것 같고, 또 그래야 대중성이 높아질 것 같다. 나이가 많다는 게 흠인데, 한편으로는 이 연령대의 연기자가 그리 많지 않다. 잘 하면 틈새시장을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병준: 계속 준비하고 공부도 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

정두언: 무죄를 받고 나오긴 했지만 감옥생활을 10개월 했다. 출소 후에도 약 1년간 재판이 계속되었다. 참으로 외로운 생활을 했다. 혼자 공원을 다니고 산을 오르기도 하고…. 그러면서 연기공부를 했다. 노래는 늘 하는 것이고.

김병준: 노래와 연기 중 어느 것이 더 어렵나?

정두언: 연기가 더 어렵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 1시간 정도 하고 나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연기하는 분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김병준: 역할이 주어지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두언: 아마추어로서는 좀 한다고 하지만 프로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꼭 잘해야만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노래도 연기도, 그리고 인생도 정치도 자기다울 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병준: 인생도 정치도 그렇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다.

정두언: 얼마 전 106세의 나이로 작고한 해리 리버만(Harry Lieberman)이라는 화가가 있다. 평생 빵과 과자를 만들어 팔다 은퇴한 후 80이 가까운 나이에 노인시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유독 그에게만 잘 가르쳐주지를 않는 거다. 리버만이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대답했다. "이미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계시잖아요."

김병준: 자기자신다운 것 이상이 없다?

정두언: 이후 리버만은 죽을 때까지 26년간 자신의 '원시 스타일'(primitive style) 그림을 계속 그렸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잘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자기다움이 중요하다는 말 아니겠나?

김병준: 정치인 정두언에게는 분명 '정두언'다운 면이 있다. 노래와 연기를 하고 싶은 정치인이어서가 아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 '왕따'가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쉽게 말해 고분고분해 보이지 않는다.

정두언: 집사람에게는 고분고분하다.(웃음) 그런데 정치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체질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김병준: 그러니 MB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임에도 집권기간 동안 별 재미를 못 봤다. 오히려 중심세력으로부터 '왕따'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나?

정두언: 안 해도 될 말을 자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일례로 18대 국회의원 공천하면서 65세 이상은 공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MB의 형님인 이상득 의원은 70세가 넘는데도 공천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때 이상득 의원이 나의 후원회 회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정두언: 말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김병준: 그 일로 시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권력'을 때리는 일이었다. 두렵지 않던가?

정두언: 솔직히 무서웠다. 사지가 다 떨렸다. 실제로 이 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몇 사람이 찾아와 진의가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 뒤 의원총회에 나가 다시 말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참아도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못 참는 성격이다.

김병준: 박근혜정부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정두언: 말이 안 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다들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이야기처럼 임금님이 벌거벗었는데 아무도 벌거벗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벌거벗은 것 맞잖아" 했더니 싫어하는 거다.

김병준: 지금도 두렵나?

정두언: 두렵고 외롭다. 하지만 함부로 휩쓸려가지 않으려 한다. 정두언다운 정치를 했으면 한다. 그러려면 내공을 더 쌓아야 한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김병준: 이번 낙선이 또 한 번 그러한 내공을 기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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