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국회 결정은 무조건 정의라고?

대통령제는 미국의 발명품이다. 목적은 의회독재 견제였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영국 의회에서 보았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 의회는 입법부 역할을 넘어선 사실상의 주권자였다. 총리를 실질적으로 임명하는 것은 물론 사법부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를 보면서 헌법 제정자들은 의회의 독주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를 고민했다. 그 결과가 입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된 대통령이다.

이런 사실(史實)은 국민의 대표가 모인 의회는 독재를 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깬다. 사실 '의회'와 '독재'는 결합될 수 없다는 믿음은 근거 없는 맹신일 뿐이다. 이런 맹신은 민주적 절차만 거치면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다는 '의회 만능주의'의 소산이다. 이는 다수의 뜻이 곧 정의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정의로워서 다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결정했기 때문에 정의롭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정치 이론으로 정립된 것은,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에 따르면 프랑스 계몽주의에 의해서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 권력의 제한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오느냐였다. 그 누구란 바로 국민이었다. 그리고 국민의 의지는 의회 내 다수의 의지를 통해 수렴된다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서는 의회 권력에 제한을 가할 필요가 없다. 국민이 지배자이고 의회는 지배자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 논리적 귀결은 끔찍하다. 의회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설사 인민의 의사에 반한 것이라도 압제가 아니게 된다. 지배자가 자신을 압제할 수는 없으니까.

재미있는 것은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론'의 논리 구조도 이와 똑같았다는 점이다. 국가의 작동 방식은 인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에서 계급은 프롤레타리아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것은 개념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착취는 없다!

의회 만능주의의 폐해는 말도 안 되는 법의 양산으로 나타난다. 법의 내용은 따지지 않는다. 입법부가 만든 법이면 무조건 정의로운 법이다. 행정부 견제를 명분으로 내세운 두 차례의 국회법 개정 시도는 이를 잘 보여줬다. 모두 국회 자체의 규칙을 이용해 행정부의 권한을 넘보는, 삼권분립 원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런 자기 권력 강화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에 의기투합했고, 두 번째 시도에서도 여당 의원들은 '뇌동'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정의를 내세운 포퓰리즘 입법이다. 민간기업에 매년 정원의 3% 이상을 청년으로 의무고용토록 한 '청년고용촉진특별법', 장기임대주택과 국공립보육시설 확대를 위해 국민연금에서 100조원을 빼 쓰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약이 그런 것들이다. 이는 기업과 연금 가입자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강탈하겠다는 얘기다. 고용을 하면 급여를 줘야 한다. 법을 발의한 국회의원이 이를 댄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기업에 고용을 강제할 수는 없다. 국민연금을 빼 쓰겠다는 것도 그렇다.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돈이지 더민주의 돈이 아니다. 가입자에게 빼 써도 되느냐고 물어봤나? 참으로 무소불위의 국회 권력이다.

하이에크는 이런 의회 권력의 무한 질주를 매섭게 질타했다. "입법부가 정한 법이면 무엇이든, 이런 법 아래서 정부가 내리는 결정은 무엇이든, 이를 법이라고 부르는 것, 이런 것만큼 웃기는 코미디는 없다. 이는 무법적 공권력 행사다." 국회는 이런 지겨운 코미디를 재연하려 한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선창(先唱)하고 야당이 추임새를 넣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상시청문회법' 재의(再議)이다. 국회의 자기 권력 증식 욕구는 이렇게 집요하다. 의회 민주주의가 타락하고 있다는 징후다. 대통령 독재든 의회독재든 독재는 독재다. 오히려 의회독재가 더 위험할 수 있다. 독재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합법적 절차'라는 가면을 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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