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빛바랜 사진, 빛바랜 추억-정미경의 '나릿빛 사진의 추억'①

안쪽에 작은 형광등이 달린 유리케이스 위에서 사진은 전체적으로 바랜 듯한 주황색을 띤 채 펼쳐져 있다. 여름이면 아무 곳에나 피어나는 나리꽃 빛깔이라고나 할까. 컬러필름으로 찍은 것이었는데 마치 흑백사진을 붉은색으로 토닝 처리한 것처럼 사진의 컬러는 한 가지 톤이었다.

(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부분)

바랜 듯한 주황색을 띤 채 펼쳐져 있는 사진… 나리꽃 빛깔… 참 통속적이고 진부한 풍경이다.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읽은 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소설… 오늘 다시 읽는다. '밤이여 나뉘어라'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정미경의 소설. 2003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집 모음에서 이 소설을 처음 접했다. 여전히 재미있다. 재미야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 이야기가 만드는 풍경은 무척 가볍다. 사진은 무엇이며 또 왜 사진이 온통 나릿빛이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가 살고 있는 방의 곰팡이 낀 더러운 벽에서 한 폭의 벽화를 읽어내는 거'라고 소설가는 말했다. 절묘한 비유다. 곰팡이 낀 더러운 벽에서도 벽화를 읽어내는 마음. 그게 사랑이다. 지나고 나면 그것이 벽화가 아니라 더러운 곰팡이임을 확인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시간에는 곰팡이조차도 아름답다. 물론 시간은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습기가 그려놓은 그 벽화 아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얘기들, 지나고 보니 지독히 가벼웠던 맹세들, 새끼 원숭이들처럼 서로를 핥으며 맛보았던 짭조름한 땀의 미각, 사랑하고 다투고 다시 사랑했던 그토록 달콤했던 투쟁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도 빛바래어진 사진처럼 제 색깔과 촉감을 잃어버리고 기억 저편에서 나리꽃 빛깔로 몽롱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했다. 남자가 하는 사진이라는 예술이 좋아 사랑에 빠진 여자.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들은 마냥 행복하다. 습기 찬 골방, 습기가 그려놓은 벽화, 그 얘기들, 그 맹세들, 서로를 핥으며 맛보았던 땀의 미각, 달콤한 투쟁의 순간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형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진도 나릿빛으로 바랠 수밖에. 결국 사진이 나릿빛으로 변한 건 이별 이후 마음에 담긴 그 지독했던 습기 탓이다. 같이 여행 가서 찍은 필름을 맡길 돈도 없을 만큼 내가 어렵다는 걸 알고 여자는, 처음엔 괜찮다고 말했고 좀 지나자 한숨을 쉬기 시작했으며 그다음엔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리곤 했었다. 여자가 떠나고 나서야 남자는 여자가 이별을 생각하고 미리 울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여자는 떠났다. 이별이 만들어 준 단절과 절망 속에서 남자는 오히려 일상으로 회귀한다. 그런대로 잘 산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옛날 필름. 그러고 보면 정말 사진처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사진관에서 현상한 사진은 비록 빛바래었지만 여자와 사랑하던 행복한 시절의 사진이다. 벌린 가랑이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포즈의 사진. 남자는 거의 잊었던 여자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문득 그립다.

"여보세요?" "나야." "잘 지내지?" "그럼. 자긴 어때?" "나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갔던 여행 생각나?"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 걸." "그랬어? 그때 찍은 사진들을 오늘 찾았어. 책상을 정리하는데 서랍 구석에 들어 있더라. 사진을 보니, 그 여행 이후로 이토록 밝고 행복했던 시간들은 없었던 것 같아. 흠. 재미있는 사진이 몇 장 있어. 괜찮다면 돌려주고 싶은데." "그래?… 그냥 찢어서 버려줘. 받아도 가지고 있을 만한 사진도 아니잖아." "그럴까." "지금 찢어줘. 그럴 거지?" "그럴게. 가끔 전화해도 될까?" "그러든지. 그럼." (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부분)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짧은 언어의 나열. 짧은 언어 속에 감춰진 수없이 많은 언어들이 숨을 쉰다. 길지 않은 문장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 또한 둘 사이의 거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찢어달라는 건 사진만이 아닐 게다. 쓸데없이 남은 추억까지도 모두 찢어달라는 것일 게다. 사랑은 이미 과거형이다. 덜렁 남아 있는 건 빛바랜 사진뿐. 하지만 이 대화는 1라운드일 뿐이다. 이야기는 2라운드로 넘어간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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