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뒤샹은 변기에 사인만해 출품
미술 고정관념 깨고 '개념적'으로 바꿔
"작가의 터치 있어야 회화"라 주장하면
팝아트 같은 현대미술 결코 탄생 못해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한 '미술계를 희롱한 조영남 대작(代作) 사건'이라는 글에서 서양화가 이태수 씨가 나를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남이 그린 작품 위에 사인(Sign)만 한다고 해서 본인의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현대미술에서는 남이 그린 그림에 사인만 해도 본인의 작품이 된다. 워홀은 물론이고, 제프 쿤스와 다미엔 허스트 등 동시대의 가장 유명한 작가들은 남이 그린 그림 위에 사인만 했다.
그는 또 "워홀은…같은 공간 내에서 작업한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하는데, 존재하지도 않은 사실을 '누구나' 아는 이 해괴한 사태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워홀은 작품의 실행을 감독하는 일을 매니저에게 맡긴 채, 자신은 주로 사무실에서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 오늘날 쿤스나 허스트 역시 100여 명이 넘는 조수들의 작업을 감독하는 일을 현장의 헤드들에게 맡긴다.
아마도 대중의 눈에는 이게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 해괴한(?) 관행의 근원은 100년 전에 발생한 어떤 사건에 있다. 1917년 뒤샹이라는 작가가 시중에서 사온 변기에 사인을 해서 거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달아 전시회에 출품했다. 결국 이 작품(?)은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이 변기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더불어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이 기념비적 사건 이후 원칙적으로는 그 어떤 것이든 작가의 사인만으로 작품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미학에서는 '미적 유명론'(nominalism)이라 부른다. 뒤샹은 그 변기로써 한 일은, '어떤 것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개념적 발상'임을 분명히 해 둔 것이다. 이로써 미술의 개념은 마침내 '시각적인'(visual) 것에서 '개념적인'(conceptual)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 글에서 이태수 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회화 작업에 있어서는 작가의 붓 터치나 화면의 질감, 감정, 철학, 색채 등과 같이 무수히 많은 것이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물인 그림으로 재탄생 된다." 다소 고루하게 들리지만, 그렇게 믿는 것은 화가 개인의 자유다. 문제는 그가 그 선을 넘어 마치 그것을 모든 화가들이 따라야 할 보편적 의무로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대단히 외람되지만 뒤샹이 변기로 깨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 고정관념이었다. 터치, 질감, 색채를 통해 감정과 철학을 전달하는 전통적 회화를 뒤샹은 '망막적'(retinal)이라 불렀다. 뒤샹은 미술을 마침내 터치나 색채나 질감을 통해 '망막'에 호소할 의무에서 해방시켰고, 그로써 최초로 미술사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되었다.
뒤샹이 미술을 망막적 회화에서 해방시킨 덕분에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팝아트와 같은 새로운 예술 언어와, 레디메이드, 설치예술, 행위예술, 비디오 아트 등 새로운 장르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태수 씨가 말하는 것처럼 터치, 질감, 색채를 다루는 것만이 미술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더라면, 현대미술을 이끌어온 이 모든 언어와 장르들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이태수 씨의 미학이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터치, 질감, 색채에 감정과 철학을 담는 미술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더 이상 미술의 전부가 아니며, 미술의 주도적 흐름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학을 30년 동안 공부했지만, 이태수 씨처럼 반드시 '작가의 터치'가 있어야 회화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1950년대 에티엔 질송 이후에는 들어본 바 없다.
뒤샹이 도입한 이 '개념적 전회'(conceptual turn)가 바로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을 가르는 기준이다. 그런데 정작 '서양화가'를 자처하는 분에게 오늘날 상식으로 통하는 이 기초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어떻게 머릿속에 현대미술 100년의 역사가 통째로 빠져 있을 수가 있을까? 솔직히 충격적이다. 어떤 예술을 하든, 시대를 앞서야지, 시대보다 뒤떨어지면 안 된다.
현대미술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붓을 든다는 것은 내게 21세기에 양자역학 없이 물리학을 하겠다는 소리로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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