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조영남 대리작 사건'을 바라보며

신옥진 시인 공간화랑대표

조영남 대리작 사건이 터졌을 때 필자는 대충 사건의 전말을 미리 짐작할 수가 있었다. 갑질 논리에 의거해서 인기연예인이 비참하게 무너지게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과 쾌감을 얻어내는 수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도매체의 본분은 사실 전달에 있고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보도매체는 미리부터 사건의 결말을 예단해서 일방적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보도에 의하면 송모 씨가 조영남의 그림을 대부분 대리제작한 것을 조영남이 팔았기 때문에 사기라는 논리다. 그렇다면 송 씨가 그린 그림을 모두 모아서 '송○○ 작품전'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그 작업들이 송 씨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조영남의 작품을 모작한 걸로 관람자들은 인식할 것이다.

굳이 학술적 논리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조영남 그림의 작업 기법은 현대미술의 범주에 속한다. 현대미술의 속성상 조수의 작업 참여 비율이 얼마가 됐을 때, 오리지널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보는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송 씨의 작업이 조영남의 승인하에서만 작업의 결과물로 성립될 수밖에 없음에 이르러면 결국 조영남의 창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나의 논리가 반드시 옳다고만은 않겠다. 송 씨의 입장이 억울하다는 세간의 여론에 각을 세우고 싶지도 않다. 조영남 씨가 본의 아니게 송 씨에게 섭섭하게 했다고 한다면 잘못된 부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되는 것 아닌가. 인간은 누구라도 부지불식간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그 대상자의 인격부터 모독하고 본론은 아랑곳없이 말꼬리 잡기만 일삼는다.

조영남은 가수로서 훌륭한 업적을 쌓은 사람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수많은 노력과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만 한다. 매스컴 출연 시 조영남의 조크 넘치는 자유분방한 말투는 사람들을 즐겁게도 하지만 늘 아슬아슬한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도 유교적 사고와 관습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에서 볼 때 그의 발언은 수위조절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언젠가 조영남은 그의 에세이에서 서울~LA 노선의 비행기 속에서 스케치한 뒤 이미지를 가다듬는 과정에서 비행기가 착륙한 것도 잊고 있었다고 그림에 대한 애착을 토로한 적이 있다.

부산서 개최된 제1회 KIAF(한국국제아트페어) 개막식에서 자신의 전국적 인지도를 활용해 언론과 화가, 화랑과 소장가를 소통시키는 가교 역할에 열정을 쏟던 광경은 지금도 필자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나라는 사람을 아낄 줄 모르는 사회적 풍토가 자리 잡고 말았다. '조영남, 송○○ 식의 등식'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끼워넣어도 사건 전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어느 누구라도 이런 등식의 덫에 걸리면 끝나고야 마는 게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회현실이다.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인해 그에 대한 반론조차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 누구도 살벌한 분위기에 겁이 나서 제대로 반론을 제기할 엄두를 못 낸다. 설령 누군가 반론을 펴 봐도 언론에서는 아예 받아주지도 않는다. 자기주장만 밀고 나가는 언론이 과연 민주국가의 보도매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제2, 제3의 조영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좀 더 성숙한 움직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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