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피란살이-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가작

한창 곱던 나이 갓 스물에 나는 서울에 있는 고모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그날도 고모 집에 갔다가 6'25를 겪게 되었다. 꽝꽝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일어났는데 의정부 쪽에서 시커먼 먹구름과 함께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벼락 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면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연거푸 올라와 하늘을 덮었다. 총성 소리였는데 총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올 때 라디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북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쪽에서는 군인들이 대부분 휴가를 나가고 전쟁을 할 준비가 안 된 상태라고 해서 두려웠다.

나는 고모의 재촉으로 일찍 서울역으로 가서 안양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탄 열차가 마지막 열차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탄 열차가 지나고 나자마자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은 관악산을 등지고 있으면서 왼쪽 멀리에는 과천시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안양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벼농사를 지어 타작하여 가마니에 넣을 때 담는 삼태기 모양으로 생겨 삼태기 마을이었다. 오목하게 자리 잡은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한 마을에 50여 가구가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신작로 변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하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오붓하게 살고 있었고, 위로는 오빠가 둘 있는데 결혼하여 나가 살았다. 앞은 넓은 들판으로 확 트여서 시내에서 들리는 정보를 공유하기에 알맞은 위치에 있는 한옥 집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중공군이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한강을 건너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어서 피란을 가야 한다고, 조용하던 마을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어서 서울까지 복귀를 했는데 갑자기 정부와 군인들이 후퇴한다고 라디오 방송에서 뉴스가 나왔다. 서울에서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섞여 밀물이 밀려오듯 쏟아져 내려오는데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했다. 숫자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몰려오는데 유엔군은 겁이 많아 대항도 못 하고 후퇴하여 수원, 대전까지 밀려가고 있다고도 했다.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어 가고 추운 겨울이 왔다. 이제는 우리 마을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피란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젊은 사람들만 가기로 하였는데 그때 사촌 언니 부부가 외가인 우리 집으로 피란을 왔다. 그러나 우리 집도 안전하지 못해 사촌 언니 부부와 나는 집을 떠나기로 했지만 부모님을 두고 가야 한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남동생은 국민병으로 입대를 하게 되어 경상도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부모님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너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며 날 설득하셨다.

집을 떠나기로 한 날, 아버지는 장사한다고 미군부대에서 사다 두었던 털양말을 꺼내왔다. 국방색 배낭에 가득 넣어 주며 배고플 때 팔아서 쓰라고 하였다. 털양말이 가득 든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남동생과 사촌 언니 부부와 같이 안양역으로 갔다. 안양역에는 우리처럼 열차를 타려고 나온 사람들로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국민병으로 가는 동생과 헤어지고는 열차를 타지 못한 일행들과 같이 화물차라도 타려고 했지만, 피란을 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라 비집고 타기도 힘들었다. 하늘에는 제트기들이 쌩쌩 지나가고 금방이라도 포탄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람들을 헤치고 간신히 올라탄 것이 군수 물자를 나르는 화물열차 지붕 위였다. 그때는 지붕 위에 탄 것만도 행운으로 알아야 했다. 그것마저도 못 타고 남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오로지 아버지 말씀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탔지만, 목적지도 없이 가면서 차라리 부모님과 함께 있을걸 후회가 되었다. 지붕 위는 괴나리봇짐과 사람들이 뒤엉겨 있어 춥고 매우 위험하였다. 사촌 언니와 나는 서로 떨어질까 봐 꼭 붙잡고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하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입고 있는 옷과 얼굴은 연탄가루 발라놓은 것같이 더러웠지만 살려는 의지로 눈만 반짝이며 빛났다.

사흘이 지나서야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열차는 대구에 도착하였다. 사촌 언니 부부와 나는 대구에서 내렸는데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동상이 걸려서 발은 퉁퉁 붓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쑤셔댔다. 사촌 언니는 그런 날 데리고 멀리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대구역전 근처에 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우리가 살게 된 집은 일본식 주택이었다. 일본식 주택은 2층 다다미방에서 4가족, 10명이 기거하게 되었다. 잘 때는 비좁아 서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야 했다. 게다가 사촌 언니 아는 친구까지 찾아와 한방에서 살게 되었고, 아침에 일어나 볼일을 보려면 줄을 길게 서야 하는 진풍경을 겪어야 했다.

나는 하루하루 생활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챙겨 준 양말을 몇 개씩 꺼내 가지고 대구 국제시장으로 갔다. 국제시장에서는 피란민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여 물건을 사고팔았는데 특히 미군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피란 나올 때 가지고 온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서 팔기도 하고 물건을 사서 되팔아 이익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목판에다가 양쪽에 줄을 달아매고는 오징어나 꽈배기, 땅콩을 파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들은 먹고살기 위하여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소리쳤다. "오징어나 꽈배기 사려!", "땅콩 사려!" 외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안양에 있는 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촌 언니를 뿌리치고 먹을 쌀 조금하고 밥을 찍어 먹을 소금 반찬을 조금 싸서 배낭에 넣었다. 나는 무작정 배낭을 짊어지고 나 홀로 일본식 주택을 나왔다. 대구에서 안양으로 향하는 길을 물어보면서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이면 하루 묵고 갈 집을 찾아 기웃거리다가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쉬어가라고 허락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인심이 좋았고 전쟁이 끝난 직후라 불쌍한 사정을 헤아려 주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해가 뜨면 안양으로 가는 길을 향하여 쉬지 않고 걸었다. 저녁이 되면 배짱 좋게 얻어서 먹기도 하고, 쌀을 조금 주고 아침을 해결하기도 하고, 점심은 주먹밥을 만들어서 싸 가지고 나섰다. 배가 고프면 소금 반찬에 주먹밥을 찍어 먹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꿀맛이었다.

청주에서 안양으로 가는 길은 다른 길보다 험난하였다. 숲이 우거진 산길을 걸어야 하고 구부러진 고갯길을 넘고 또 걷고 걸어야 했다. 해 질 녘에는 쉬어갈 집을 찾아 사정 이야기를 하고는 그 집 툇마루 방이나 때로는 담벼락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했다.

곱던 갓 스물의 내 모습은 갈수록 초라하고 거지꼴이 되어갔다. 입고 있던 옷뿐만 아니라 머리며 손과 발 어디도 집을 떠날 때의 고왔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을 만날 생각을 하면서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 곧 안양이 가까워진다는 걸 안 나는 '부모님은 건강하게 살아 계실까?' '집은 포격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추운 겨울에 열차 지붕 위로 올라타던 안양역은 비교적 한적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아우성치던 그때의 역전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왔다. 가슴에서는 그리움과 설움이 눈물이 되어 목으로 올라왔다.

그립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못 뵐 줄 알았던 부모님을 만나니 피란 시절 동안 참았던 눈물이 복받쳐왔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끌어안고 실컷 목 놓아 울었다.

#다음 주는 수필 부문 가작 수상작인 전상준 씨의 '어머니가 보고 싶다'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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