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리와 울림] '신공항' 이름 유감

서울공고
서울공고'경희대(법대)'미국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졸업. 전 미 연방 변호사. 현 KBS1 라디오 공감토론 진행자

시험 볼 때 없던 선택지를 정답이라 우겨

시험관만 혼자 아는 번호는 선택지 못돼

靑 "김해공항 확장이 신공항"이라 호도

대통령 이미지 위해 신뢰부터 저버려

1학기가 끝났다. 학생들은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교수들은 아직 아니다. 채점과 성적 입력이 끝나야 된다. 사실은 한고비를 더 넘어야 한다. 학생들의 성적 이의 제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B학점만으로도 감지덕지했는데"라는 한탄은 교수들끼리 한번 해보는 위로에 불과하다. 취업이 어려워진 탓인지 자기주장이 강한 세대여서인지 학생들은 학점에 점점 민감해진다. 협박형, 읍소형 등 학생들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출제와 채점에 더욱 철저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만약 시험 볼 때 제시되지 않은 답을 나중에 정답이라고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문제를 잘못 냈지만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학생들이 승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나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학생들은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다.

신공항 논란을 처리하는 정부를 보면 실제로 그런 교수를 대하는 듯하다. 애초에는 1번 가덕도, 2번 밀양, 혹은 1번 밀양, 2번 가덕도, 둘 중 하나를 '신공항'으로 선택하라는 객관식 문제였다.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채점 결과를 내놓으면서 3번 '김해공항 확장'이 정답이라고 한다. 신의 한 수요,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찬사까지 나온다. 게다가 김해공항 확장은 확장이 아니라 '신공항'이라고 한다. 어리둥절하다. 전문적 평가를 부정할 근거는 물론 없다. 복잡한 데이터를 반박할 능력도 부족하다. 김해공항 확장이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염려한 차선책일 수도 있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의 전문적이고 전략적 의견 등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면도 있다.

사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정부의 태도가 시험 볼 때 전혀 없었던 선택지를 시험 친 후에 내놓고 정답이라 우기는 시험관의 모습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정부는 원래 김해공항 확장도 답지 중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채 시험관만 알고 있었던 번호는 결코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기존 공항의 '확장'을 '신공항'이라고 포장하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공항' 공약을 지켰음을 강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곡학아세가 오히려 신뢰를 더욱 갉아먹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청와대만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파동 등이 대표적이다. 세금을 올리고 싶고, 실제로 세금을 올리는 조치였지만 세금 올리는 게 아니라고 우겨댔다. '증세 없는 복지'를 주창한 박 대통령의 공약을 의식한 때문이었음은 다 아는 얘기다. 과거 세무조사가 거의 없었던 조그만 사업체까지도 세무조사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불황이지만 세금이 엄청나게 더 걷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연말정산 파동 때 청와대 관계자가 세금은 거위 털 뽑듯 모르게 걷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오만함이 아닐 수 없다. 민심이 이반되고 여당의 총선 참패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처럼 진실을 호도하는 정부의 자세 때문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진지하게 호소했어야 했다. 국민이 원하는 수준의 복지를 하기 위해서는 십시일반 더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누구든 정부 책임자가 직접 솔직하게 증세 필요성을 설명했다면 국민은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변수를 따져보았을 때 김해공항 확장이 신공항 건설보다 낫다면 당당히 그렇게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면 된다. 선거공약보다 중요한 게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임을 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김해 신공항' 운운은 또다시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옛 성현은 병(兵)과 식(食)과 신(信)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게 신이라 했다. 안보나 경제가 튼튼해도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다는 말이다. 대통령 이미지 지키기에 매달려 가장 먼저 신뢰부터 저버리는 정부의 행태가 참으로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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