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김일성 집단이 불법남침을 감행했을 때 북한 공산군 총참모장(남한의 합참의장) 강건(대장)이 38선으로 전진배치한 7개 보병사단과 1개 탱크여단, 5개 예비사단과 1개 탱크연대 등 소련제 일색인 중무장 병력 총 20만 명을 지휘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경북 상주 출신이었다. 여기에다 낙동강까지 밀고 쳐내려 온 제1집단군(군단) 사령관 김웅(중장) 역시 김천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그 당시 대구'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을 때 최전방으로 돌변한 낙동강 유역은 조국수호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북괴군은 전쟁 발발 불과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진출하고 내내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낙동강 중상류의 요충지를 다 내준 뒤 칠곡 왜관'다부동과 영천선(線)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하지만 군위를 거쳐 가산산성과 영천 신녕까지 진출한 북괴군의 105㎜ 곡사포탄이 대구역 광장에 떨어지고 대구마저 풍전등화와 다름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후 촌각을 다투어 미 육'해'공군의 주력부대가 속속 투입되고 한'미연합군은 다부동과 영천대회전에서 가까스로 대구를 사수하지만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던 마지노선(線)에는 수십만 명의 병력과 양민이 낙동강 모래펄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며 풀 이슬처럼 스러져갔다.
이 격전의 와중에 미처 피란도 못 가고 갇혀버린 지역주민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태극기와 인공기를 준비하고 국군을 만나면 태극기를, 북괴군과 마주치면 인공기를 흔들어주는 웃지 못할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빨갱이'이나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연좌제에 묶이기 일쑤였다. 좌익 아니면 우익으로 치닫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망각의 세월 탓인가. 우리는 그동안 그런 비참한 희생의 역사를 잊고 살아왔다. 특히 전후세대들은 우리 고장이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낙동강을 젖줄로 삼아 옥토를 일구고 산업을 일으켜 자유와 평화를 구가했다. 심지어 일부 종북단체들은 핵'미사일까지 개발해 3대에 걸쳐 남침야욕을 불태우고 있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고무돼 과거를 외면하고 오늘의 현실을 '헬 조선'으로 비하하고 있다. 어두웠던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와 6'25의 참극을 국민적인 호국교훈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66년 전의 낙동강 교두보 곳곳에는 충혼탑과 승전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나 그 당시 치열한 방어전 외에 아군이 선제공격으로 승전한 전적지는 상주 화령장전투 한 곳밖에 없다. 어디 그뿐인가. 광복 이듬해 대구 10'1사건을 일으키고 팔공산 갓바위로 숨어든 남로당 공비들이 식량조달을 위해 경산시 와촌면 박사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양민들이 반동으로 몰려 학살당한 이 마을은 한날한시에 제사가 든다고 했다.
이렇듯 낙동강 유역 곳곳에는 아직도 6'25의 상흔이 수없이 묻혀 있지만 아전인수 격으로 전해지는 국가기록 외에 참전용사들과 지역주민들의 진솔한 개인사적 이야기는 제대로 발굴되지 않고 있다. 역사의 현장을 본래 모습대로 복원해 호국의 교훈으로 보존하는 문제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여기에는 정확한 고증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고 이제 80대 중반에 든 생존자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마저 사라지면 누가 역사의 증인이 될 것인가. 각 지방자치단체는 뒤늦게나마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채록하여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