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무조건 전쟁에 나가야 되는 줄 알았지. 근데 후손들이 몰라주니 섭섭하지."
소년병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윤한수(82'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 사무총장) 씨. 스스로 '역사에서 숨겨진 소년병'이라고 소개하는 윤 씨를 24일 중구 동인동1가 소년병전우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소년병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17세 이하의 나이로 군번을 받고 입대한 약 3만 명의 '참전용사'를 말한다. 대다수 국민은 6'25전쟁 당시 소년병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윤 씨는 "올해 교학사 등 교과서에서 처음 소년병이 언급된 만큼 우리는 철저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어. 정부 입장에서는 18세 미만의 어린 소년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치부를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거지"라고 했다.
당시 15세였던 윤 씨는 소년들까지 전쟁에 동원한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전력이 너무 부족했어. 남침 당시 북한군 전력은 17만 명인 반면 8월 4일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한국군은 3만 명만 남았을 뿐이지. 그러니 온 국민이 반강제로 전쟁에 동원됐지."
윤 씨는 친구 셋과 모병소를 찾았지만 군의관은 키 160㎝, 몸무게는 60㎏이 채 되지 않는 윤 씨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윤 씨는 학교장 추천서를 들고 다시 모병소를 찾았다. "그때는 정말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어. 그저 친구들을 따라 입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서 죽기 살기로 입대했지. 전쟁이 그렇게 끔찍한 것이라는 걸 미처 몰랐어."
윤 씨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죽음에 이른 사람이 부르짖는 비명은 제아무리 대단한 연극배우라도 흉내 내지 못할 거야. 딱 일주일 훈련받고 1사단에 배치돼 영천전투에 투입된 첫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리어카에 실려가는 사람을 보고 돌부처처럼 굳어서 눈을 떼지 못했어. 고참이 정신 차리라며 내 엉덩이를 걷어차기에 겨우 걸음을 뗐지."
그는 전쟁에 익숙해진 뒤 시쳇더미가 쌓여 구더기가 들끓어도 등지고 앉아 주먹밥을 먹는 게 익숙해졌다고 했다. 윤 씨의 오른쪽 얼굴에는 영천전투에서 맞은 수류탄의 파편이 아직도 박혀 있다.
66년이 지난 현재, 윤 씨에게 전쟁의 기억은 썰물이 빠지듯 흐려졌지만 조국에 대한 서운함은 씻기지 않는다.
윤 씨는 "2005년에 국방부에 6'25전쟁 당시 소년병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진정을 넣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지. 이후 전우 600여 명의 병역 증명을 모아 청와대에 탄원을 넣고서야 2008년 6월 25일 소년병이 공식적으로 명문화됐다"고 했다.
윤 씨의 바람은 하나다. 소년병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소년병들을 위해 현충 시설이나 하다못해 기념비 하나라도 세워주는 것이다. 윤 씨는 최근 사진을 모으고 기억을 더듬어 책을 쓰고 있다. "책장에서 썩히는 한이 있더라도 책을 쓰면, 후손 중 누군가는 책을 발견해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겠어."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