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주리지 않기 위해 이국땅서 품팔이
외국인 근로자 체불임금 독촉에 화나
급여 440만원 동전 2만여 개로 지급
한국에 대한 부정적 기억 어떡하나
조금 배부른 소리를 할까 한다. 옛말에 "곳간이 충실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고, 또 "예절이란 소유로부터 생겨나고 결핍으로부터 없어진다"고도 했다. 모름지기 먹을 게 좀 쌓인 연후에야 자기나 주변의 됨됨이를 챙기는 여유가 생긴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물 건너에도 똑같은 말이 있다. 영어로 "A hungry man is an angry man"이란 말이 그것이다. 배가 고프면, 화가 나기 마련이란 말이잖은가!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게 똑같은 모양이다.
우리도 참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만 해도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에 났으니, 어릴 적 항상 배가 고팠다. 하루 두 끼가 기껏이었고, 그것도 요즘 영양으로 따지면 형편이 없었다. 방과 후면 뭐든지 입에 넣을 수 있는 걸 찾으러 산천을 헤매기도 했다. 그래선지 어느 날, 아제가, 삼촌이 월남도 가고, 중동도 가는 헤어짐을 목격하곤 했었다. 가장이 얼마 되지 않는 논밭을 식솔에게 맡기고 일 찾아 한참씩이나 집을 비웠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싯적에는 왠지 불안했고 뭔지 모를 화만 그득하지 않았는가 싶고, 그럴수록 투지만 드높았다 싶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많이도 변했다.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오히려 들어와 작업현장을 메우고 있는지 놀랄 지경이다. 장거리 버스나 기차를 자주 타는 사람이면 단번에 안다. 이들이 일감 찾아 이동하는 범위나 속도가 또 얼마나 넓고 빠른지를 말이다. 스마트폰 덕택인지, 이들 간의 네트워크는 소통을 넘어 정보공유로 그득하다. 이렇듯 외국 근로자들과 가까이하다 보니 좀 엉뚱하다 싶은 일들도 생겨나는 게 또 전혀 엉뚱하지만은 않다 싶다.
얼마 전에 한 건축업자가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체불임금을 독촉하자 화가 나서 급여 440만원을 100원짜리 동전과 500원짜리 동전 2만여 개로 지급했다는 해프닝이 언론을 탔었다. 건축업자는 업자대로 공사비를 못 받아 화가 난 상태였다고 하고, 근로자는 그들대로 임금을 못 받고 있으니 '영영 못 받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화가 났을 것이다. 누구라도 배고픈 만큼이나 화나기 마련이니,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생각해 보면, 건축업자의 배고픔은 갑질하는 원청업자와 대비된 상대적 배고픔이었을지 모르겠다. 빠른 성장만큼이나 우리 사회가 가지게 된 어두운 성장통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니 말이다. 한편 우리말도 시원찮아 하답답하기만 한 외국 근로자들은 배를 주리지 않기 위해 머나먼 이국까지 품 팔러 온 만큼이나 물리적인 배고픔을 더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더 불안한 화가 더 피부에 와 닿아 체불 임금을 더 독촉하지 않았을까 이해해 본다.
진인사(盡人事)에 침 못 뱉는 법이겠고, 영어에 "All doors are open to courtesy"가 뜻하는바, 먼저 예를 다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도 그들보다야 우리가 조금은 나은 편임을 잠깐만 환기했었더라면, 수고스럽게 은행 여러 곳 돌며 동전 구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고, 일이 커지고 난 연후에 겸연쩍은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한다. 또 걱정은 된다. 외국 근로자들의 가슴에 못 박힌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만은 만인의 상냥함으로도 쉽게 상쇄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과(因果)가 말이다. 모든 게 한순간, 한 끗 차이일 뿐이다. 어디 고관이나 갑부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일까? 오히려 빳빳한 지폐로 표현하는 덜 가진 자의 소박한 배려라면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지 않을까.
말이야 원리원칙대로 했다 싶지만 필자의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다. 시절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온통 터져 나오는 갑질이며 사욕 챙기는 가진 자들의 모습이나, 그사이 풍요롭기만 했던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돈 만들어 퍼주려고만 하는 정책이나, 이심전심으로 다 아는 우리네 마음을 통 몰라만 주는 정치권의 시계(視界) 절벽까지, 어느 하나 배고파 성난 민심에는 위안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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