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 인사이트] 등급에 웃고 우는 영화들

가족살해 장면이 '15세 관람', 후한 판정 '곡성' 700만몰이

영상물등급위원회의 평가 기준을 두고 영화계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사냥'과 '비밀은 없다' 등 신작들이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으면서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곡성'보다 약한데 무슨 소리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 상태다. '곡성'에 15세 관람가 등급을 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이던 영상물등급위원회가 굳이 자신들의 영화에만 엄격한 잣대를 갖다댄다며 잔뜩 입이 나왔다. 그나마 '사냥'은 재분류 작업을 통해 가까스로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말 그대로 지난달 개봉된 '곡성'의 등급을 두고 판정 기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곡성'이 '추격자'나 '황해' 등 나홍진 감독의 전작에 비해 잔인한 장면에 대한 직접적 묘사가 줄어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존속살해를 다루고 어린아이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는 등 15세 관람가라고 하기엔 '과하다' 싶은 설정이 많아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곡성' 15세 관람가 영화인도 놀라

앞서 '곡성'의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 등을 통해 "전작과 달리 15세 관람가를 노리고 수위 조절에 신경 썼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전작에서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받은 나홍진 감독이지만 작품의 수위가 높아 매번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던 터. 이번엔 아예 흥행에 좀 더 유리한 등급을 받기 위해 애썼다는 말이다.

분명 '황해'나 '추격자'에 비해 폭력 및 노출 등 선정적인 장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줄어든 건 확실했다. 하지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가족을 살해하는 등 충격적인 내용으로 관객을 압도했다. 영화의 놀라운 완성도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영상물등급위원회의 관람등급 판정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곡성'은 15세 관람가 등급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지난달 12일에 개봉돼 6월 4주차까지 무려 7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모았다.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아낸 후 '나홍진 영화가 달라졌다'고 홍보한 결과다. '나홍진표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수요가 있었던 데다 등급이 낮아져 관람객 연령대 폭까지 넓어지면서 빠른 속도로 흥행가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앞서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는 500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의 관객몰이는 바랄 수 없었다. '황해'는 완성도에 대한 뜨거운 호평에도 불구하고 216만 명 수준에 그쳤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인데다 잔혹한 묘사 등에 대한 입소문 때문에 여성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고무줄 판정 기준 매번 논란

'곡성'의 15세 관람가 판정 자체를 비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국내 영상물등급판정 기준이 지나치게 엄해 창작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입장이다.

다만, '곡성'이 등급 분류 기준에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관대한 대우를 받은 건 분명 팩트다. 지난 등급 판정 사례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2013년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는 아예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이 등급은 특정 극장에서만 상영이 가능하지만, 국내에 제한상영가 등급 영화를 걸어주는 극장이 없어 사실상 '상영불가'에 해당한다. 모자간 성관계 묘사와 성기를 자르는 장면 등이 문제가 됐다. 김기덕 감독이 "특정 장면만 보지 말고 영화 전체를 보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읍소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수차례 재심사 끝에 지적받은 장면을 잘라내고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김선 감독의 영화 '자가당착'도 2011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죽은 경비원을 불에 태우거나 마네킹의 목이 잘리는 장면 등이 문제라고 지적받았다. 이후 김선 감독이 표현의 자유 침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 2013년에 비로소 승소했다.

두 케이스 모두 지적받은 장면만 살펴보면 '문제적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나 전체적인 흐름을 무시한 채 특정 장면에만 초점을 맞춰 상영 자체를 막아버린 건 과도한 '검열'일 뿐이다. 그 외에도 영상물등급위원회는 공포심리를 자극하는 스릴러 영화 '숨바꼭질'에 15세 관람가 등급을 주면서 '연애의 온도'와 '전설의 주먹' 등 크게 지적할 만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던 작품에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내려 '기준이 뭐냐'는 비난을 들었다.

◆신작들도 등급 기준에 몸살

2014년 개봉된 '좋은 친구들'도 보험사기 소재와 폭력 묘사 등의 이유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 사이에서 '자극적이라고 할 만한 장면이 별로 없었다'는 반응이 나와 논란이 됐다. 반면, '군도'는 목이 잘리는 신 등 '센 장면'이 나오는데도 '폭력을 미화하지 않았으며 사회통념상 용인되는 수준의 주제'라는 이유로 15세 관람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신작 '사냥'과 '비밀은 없다'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29일 개봉되는 '사냥'은 금을 차지하기 위해 산에 오른 엽사들과 이들의 행동을 알게 된 사냥꾼의 추격전을 그린 영화다. 안성기와 조진웅, 손현주 등이 출연한다.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살상 장면 등이 거칠고 지속적으로 표현된다'며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가 이후 20초가량 컷을 삭제하고 15세 관람가를 받아냈다.

23일 개봉된 '비밀은 없다'는 선정성 및 폭력성 등을 지적받아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연출자 이경미 감독은 "정서적으로 센 영화라 이 등급을 준 것 같다"고 받아들이면서도 "'곡성'의 선례가 있어 우리 영화도 15세 관람가를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며 아쉬워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딸이 실종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며 김주혁과 손예진이 출연한 영화다.

◆흥행 여부 등급에 상당 부분 좌우

사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데 있어서는 등급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흥행성과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는 순간 관객 연령대 폭이 좁아지는데다 '센 영화'라는 편견 때문에 외면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실제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영화 중 관객 수 900만 명을 넘긴 '내부자들'과 700만 고지를 넘긴 '곡성'을 제외하면 '메가히트'라고 할 만한 성과를 올린 작품이 많지 않다. 대개 300만~400만 명만 모아도 '청불 등급 최고수준'이란 말을 듣는 게 일반적이다. '내부자들' 이전에는 600만 명을 끌어들인 '아저씨'와 560만 명을 불러들인 '타짜' 정도가 유일한 '청불 히트작'이었다. '내부자들'과 '곡성'의 성공케이스가 있어 등급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관객몰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문제는 국내 영상물등급 분류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데 있다. 현대극보다 사극에 은근히 관대한 입장을 보이고 유력 영화사나 스타감독의 작품에도 은근히 후한 점수를 준다. 불과 10여 명 남짓한 인원이 국내 모든 영상물 등급을 분류하다 보니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미국 등 해외의 예처럼 민간자율기구를 설립해 체계적으로 분류작업을 하면 좋을 텐데, 국내의 경우 정부기관에서 분류가 이뤄져 형식적 절차에만 신경을 쓰거나 관리체계가 느슨해질 때가 많다. 최근 설립 50주년을 맞은 영상물등급위원회는 각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신속'정확한 등급분류를 위한 시스템 개선 및 보완에 나선다고 밝혔다. 등급분류 과정에서 고생한 여러 영화인들에 대한 사과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현 시스템을 뒤엎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들의 약속대로 개선하고 보완해 오류를 최소화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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