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그 사진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돌려받는 게 나을 것 같아." "어떡하지. 방금 다 잘라버렸는데." "그랬어? 아이 참." "아무래도 가지고 있긴 좀." "그래서가 아니고. 다 잘라버렸단 말이야?" "그래. 다 잘라버렸어." "후우. 할 수 없지 뭐. 그럼 그거 잘 버려줘." "갑자기 무거워지네. 알았어."
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부분
사진을 돌려받고 싶다고 다시 전화한 여자. 사실, 남자는 이미 사진을 잘라 버렸다. 작은 아쉬움마저도 남기지 않기 위해 가위로 날카롭게 잘라버렸다. 그 말에도 여자는 잘 버려 달란다. 2라운드는 아무래도 무승부쯤 되나 보다. 이렇게 끝났다면 이야기는 다소 싱겁다. 어쩌면 예상이 가능한 흐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야기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3라운드. 다음 날 새벽, 여자는 얼마나 급했는지 맨발 차림으로 남자의 방을 찾는다. 그리고 집안 곳곳을 뒤진다. 나릿빛 사진을 찾기 위해. 하지만 이미 잘라서 버린 사진이 나올 리 만무하다. 사진은 없다. 그리곤 하는 말.
"나 결혼해."…. "누구라고 얘기하면 자기도 알 만한 사람이야."…. "사진은 걱정 마."…. "방이 차다. 그땐 습하고 더웠었는데." "난방을 안 했어." "새벽엔 서늘한데 따뜻하게 해 놓고 지내. 발 시리겠어."…. "안아줄래?"(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부분)
그리고 여자는 나를 위로하는 척 안아달라고 한다. 위로치고는 무척 잔인한 위로이다. 남자들이 이런 종류의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쓰지는 못했을 게다. 이별에 임했을 때 여자들은 강하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실하다. 이야기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다. 4라운드. 여자와 결혼하기로 한 다른 남자의 등장. 흔한 삼각관계로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정작 결과는 근본적으로 약자인 나의 전적인 패배이다. 새로운 남자는 사회적으로 강한 남자이다. 남자의 직장인 병원에까지 건장한 사내들을 동원하여 폭력을 가한다. 사진을 돌려달라는 강요. 어쩌면 그 새로운 남자는 과거의 남자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당혹스럽다. 사진은 이미 없으니까.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성민 씨,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사진을 돌려줘 버리면 되잖아."…. "일 년이나 지난 지금 사진 때문에 전화를 했다면 그 사진을 없앴을 리가 없다고 그 사람이 그랬어. 그 사람이 자꾸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믿어져. 성민 씨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무엇보다도 내가 믿는 건 이제 소용이 없어. 그 사람이 납득하기 전엔." "어떻게 하면 납득이 되는데?" "사진이 없다는 건 납득시킬 수가 없게 됐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부분)
이미 사진은 없다. 그런데 사진이 없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없게 되었다. 방법은 하나. 다시 찍을 수밖에. 그것조차 신선(?)하다. 그런데 이것이 게임이라면 과연 승리의 미소는 누가 짓고 있을까? 마지막 대목을 읽어보자.
떠나기 전날 밤 윤미는 소리 없이 울면서 나를 안았었다. 섬모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며 내가 안고 있는데도 안아 달라고 눈먼 두더지처럼 내 품을 파고들었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다음 날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우주의 이면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가장 가까웠던 타인의 경우도 결국 그러하지 않았는가. 윤미 역시 지금 내가 사진을 돌려주겠다고 불러놓고 그 사진을 다시 찍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윤미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달콤했다. 그 나릿빛 사진을 찍던 날 우리는 행복했고 또 행복했었지.(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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