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등 이민자 적극 수용했던 EU
브렉시트 시작으로 20여 년 만에 균열
일부 극우파 '이민자 혐오' 정서 악용
제노포비아 악몽 재연될 가능성 높아
2005년 여름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한 달 정도 앞둔 때였다. 친하게 지냈던 영국인 교수의 초청으로 런던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 런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 때문에 원하는 날짜의 항공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고민하다 선택한 방법은 모스크바에서 런던까지 육로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막 유럽연합에 가입한 라트비아까지만 가면 런던으로 갈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구 소련에 속했던 라트비아까지는 모스크바에서 자주 기차가 있었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는 런던까지 가는 버스표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유럽 전역을 운행하는 버스회사 유로라인이 그즈음 라트비아까지 연결된 것이다. 유럽대륙을 동에서 서로 버스로 횡단하는 힘든 여정이지만, 러시아에 살면서 보통 이삼일씩은 기차나 버스를 탔던 경험이 있던지라 별로 두렵지 않았다.
당시 그 버스 안 풍경은 상당히 이채로웠다. 여행객으로 보기 힘든 허름한 차림의 라트비아인들이 버스를 채웠고, 중간 기착지인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동유럽 사람들이 버스에 속속 올랐다. 영어도 러시아어도 유창했던 옆자리 라트비아 공대 여학생은 런던까지 간다고 했다. 여름 방학 동안 그곳에서 딸기 따는 일을 하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단다. 자기 나라에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졸업 후엔 서유럽에서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 라트비아 여권으로 서유럽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고 자랑도 했다. 동유럽 각국들이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쪽을 지향하고 있음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더불어 유럽연합이 물리적 통합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을 염두에 둔 기획임도 감지되었다. 유럽연합에 느슨하게 참여하면서 통화나 이민법 등에서 별도 노선을 채택한 영국조차 노동시장을 열어둔 것은 연합의 새 구성원이 된 동유럽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브렉시트를 시작으로 유럽연합에 균열과 해체의 조짐이 보인다. 1990년대 초 출범한 유럽연합은 단순한 경제공동체를 넘어 하나의 통합 유럽을 표방하면서 그 세력을 동쪽으로 넓혀나갔다. 그런데 서쪽의 전통 강국 영국이 온전히 독자 노선을 걷겠다니, 유럽연합에 비교적 늦게 가입한 동유럽 각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게 생겼다. 영국 내에서의 반이민자 정서가 주로 무슬림과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 정서가 심화되고 이를 악용하는 극우주의자들의 정치적 세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지난 세기 제노포비아의 악몽이 재연될 가능성도 보인다.
브렉시트로 촉발된 유럽 균열의 조짐은 이렇듯 불안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연합의 해체는 통상 구성 국가의 독립성과 자율성 존중이 아니라, 타민족이나 인종을 배타하는 분위기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당장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극우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유럽 각국의 정치적 환경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연방해체 이후 최근까지 극단적인 민족 분쟁과 인종 충돌의 장이 되었던 러시아와 구 소련의 역사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1990년대 초 공고했던 사회주의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그 구성 국가들의 독립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에서는 인종 혐오 범죄가 내전으로까지 이어졌고, 그 피와 반목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브렉시트로 가장 이익을 보는 나라가 러시아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크림반도 사태와 시리아 파병 이후 서구로부터 군사적 압박과 경제제재를 받던 러시아로선 영국의 탈퇴로 유럽연합의 결속력이 느슨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리라. 더불어 자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동유럽 각국의 내홍을 바라보는 것도 내심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통합과 해체의 역사를 미리 겪었던 러시아가 이제는 보다 느긋한 입장이 된 것은 분명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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